기도하지 않는 자신이 너무 밉고 싫다는 분을 만났습니다. 신앙심이 깊은 분께 물어보면 동기부여가 되어야 기도를 잘 할 수 있다고 하는데, 솔직히 자신은 동기부여가 잘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침에 일어나 열심히 기도하면서 오늘 하루 잘 살겠다고 다짐하지만, 저녁에는 기도도 하지 않고 아무 생각 없이 텔레비전만 보고 있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자기 힘으로는 도저히 안 되니, 주님께서 도와주셔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분은 왜 기도하는데 동기부여가 되지 않을까요? 텔레비전을 보고 싶은 동기 수준이 더 높아서입니다. 동기부여가 안 되는 것이 아니라, 동기 수준이 높은 것을 먼저 할 뿐입니다.
저는 다른 어떤 바쁜 일이 있어도 20년 넘게 새벽 묵상 글을 꼭 쓰고 있습니다. 제 동기부여 수준에서 높은 자리를 이 묵상 글이 차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기도와 묵상입니다. 그래서 기도와 묵상이 제 동기부여 수준에서 최고 높은 수준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주님께 나아가는 자신의 동기부여 수준을 높이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동기는 가지는 것이 아니라 부여하는 것입니다. 이 점을 명심하여 주님께 어떤 의미를 두고 있는가를 찾아봐야 합니다.
바리사이와 헤로데 당원이 예수님께 다가옵니다. 바리사이 사람들은 로마에 세금내는 것을 거부했고, 이에 반해 헤로데 당원들은 로마에 세금을 내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서로 반대되는 행동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서로가 서로를 경멸하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둘이 힘을 모읍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이렇게 곤란한 질문을 던집니다.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합당합니까? 합당하지 않습니까? 바쳐야 합니까, 바치지 말아야 합니까?”
세금을 내라고 하면 민족의 반역자가 될 것이고, 세금을 내지 말라고 하면 로마의 반역자가 되는 진퇴양난의 상황을 만든 것입니다.
서로 경멸하는 사이였지만, 그들은 자기들이 반대하는 예수님을 제거하기 위해서 이렇게 함께 간계를 꾸밉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잘못한 것은 무엇입니까? 아무것도 없습니다. 자신의 부끄러운 부분을 드러낸다는 이유 정도를 말할 수 있겠지요.
그들의 동기부여는 자신을 높이는 삶이었습니다. 자신을 높일 수만 있다면 경멸하는 사람과도 손을 잡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참 진리의 모습으로 다가오시는 주님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나 자신의 동기부여가 주님을 향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 안에서 참 진리의 길을 향해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만약’과 ‘다음’
미국의 어느 심리학자가 심리적 질병과 그 치유 방법을 다룬 책을 출판했습니다. 이 책은 곧바로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았고, 수많은 대학과 기업에서 그를 초대했지요. 그런데 어느 날, 한 대학에서 강연을 시작하면서 자신의 책을 집어 들며 이렇게 말합니다.
“이 책은 무려 천 페이지나 됩니다. 3천여 가지의 치료 방법과 1만여 가지의 약이 소개되었지요. 하지만 이 책의 내용을 단 몇 글자로 줄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는 칠판에 ‘만약’과 ‘다음’이라는 글자를 쓰며 말합니다.
“많은 사람이 힘들어하는 이유는 '만약' 때문입니다. '만약 내가 이 사람과 결혼하지 않았더라면', '만약 그때 직업을 바꿨더라면' 등을 생각하며 갈등을 키워 가지요. 하지만 이것은 한마디로 바꿀 수 있습니다. '다음'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다음에 기회가 생긴다면 꼭 그렇게 해야지', `다음에는 그 사람을 놓치지 말아야지'처럼요. 사람들은 이런저런 불만 때문에 자신이 불행하다고 여기지만, 상황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면 지금보다 훨씬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돌이킬 수 없는 과거를 돌아보느라 미래를 내다보지 못한다면, 여러분은 영원히 불행에서 벗어나지 못할 겁니다.”
여러분 마음속에는 ‘만약’이 있나요? 아니면 ‘다음’이 있습니까?
(조명연 마태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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