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2일 _ 조명연 마태오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1-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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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생 때 방학이 되면 친구들과 산에 가곤 했습니다. 그중 인상 깊었던 산행이 떠올려집니다.
여름방학 때, 친구들과 설악산을 갔는데 그날 비가 주룩주룩 계속 내리는 것이었습니다. 오랜만의 등산인데 비 때문에 오르지 못하면 안 될 것 같아서 강행했습니다. 그런데 점점 몸이 무거워지는 것입니다. 그때 한 친구가 너무 힘들었는지 제게 부탁을 합니다.
“내 배낭에는 부식이 가득 들어있어서 너무 무거워. 배낭을 바꿔서 매면 안 될까?”
친구가 너무 힘들어하는 것 같아서 흔쾌히 바꿔서 맸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제 배낭은 가벼워졌습니다. 왜냐하면 오랜 시간의 산행으로 힘이 빠진 친구들이 제 배낭 안의 부식을 먹었기 때문입니다. 밤늦게 숙소에 도착했을 때, 배낭은 거의 비어 있었습니다.
친구를 도우려는 마음이 오히려 저를 편하게 해주었습니다. 그런데 사랑의 실천은 원래가 이런 것이 아닐까요? 남을 위한 행동인 것 같지만, 결국은 자기에게 커다란 이득을 가져다줍니다. 특히 하느님 나라에서는 이 사랑의 실천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십니다. 따라서 그 사랑의 실천으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면 이보다 더 큰 이득이 어디에 있을까요?
가난한 과부가 렙톤 두 닢을 헌금합니다. 이는 아주 적은 돈이었습니다. 그래서 남 보기에는 놀림감이 될 수도 있는 봉헌이었습니다. 어떤 이는 “그렇게 적은 액수는 티도 나지 않아.”라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가난한 과부에게는 하루치의 식량 값이었습니다. 다른 이에게는 티도 나지 않는 적은 액수이지만, 가난한 과부에게는 너무나도 큰 전부였습니다. 이를 예수님의 말씀으로부터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넣었다.”
놀림감이 될 수 있는 봉헌이지만, 가난한 과부는 사람들의 시선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보다 하느님께서 주신 사랑에 조금이나마 보답하고자 하는 마음이 더 컸던 것입니다. 그래서 생활비 전부를 봉헌할 수 있었습니다.
그에 반해 부자들은 어떠했을까요? 그들은 하느님의 눈치가 아닌 사람의 눈치만 보았을 것입니다. ‘이 정도면 충분할까? 너무 적지 않나? 아니 너무 많은 것은 아닐까?’ 등의 생각을 가지고 사람의 눈치만 보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하느님을 바라보지 않는 봉헌에 하느님께서 굳이 바라보실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가난한 과부의 정성 어린 봉헌이 결국 그녀를 구원의 길로 이끌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어떤 봉헌을 하고 있습니까? 정성 가득한 봉헌은 우리에게 더 큰 선물로 다가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