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공평한가요? 아니면 불공평한가요? 당연히 불공평합니다. 저의 자발적 선택 없이 삶의 시작부터 많은 것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국적, 성별, 부모 형제, 가정환경, 외모, 건강, 재능 등등…. 저의 선택 없이 무조건 받아들여야만 했습니다. 시작부터 불공평한 삶임을 보여줍니다.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것들과 살아가야 하는 삶의 기본 조건이라는 것만 모두 공평할 뿐입니다.
여기서 차이를 보이는 것은 이 조건을 어떻게 받아들이냐는 것입니다. ‘내 삶에 주어진 것들을 거부하고 불평하며 살 것인가?’ 아니면 ‘주어진 것을 받아들이며 나만의 삶을 만들며 살 것인가?’에 따라 달라집니다.
자신의 삶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인생의 변화가 시작된다고 합니다. 저 역시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을 때는 불평불만에 아무것도 하지 못했었습니다. 그러나 신학교에 들어가서 제 모습을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감사의 이유를 찾을 수 있었고, 이로써 변화를 가져올 수 있었습니다. 그 후에 할 수 있는 것이 너무나 많음을 깨달았습니다.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것들과 살 수밖에 없는 우리의 삶 안에서 어떤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불평만 하기에는 자기 삶이 너무 아깝지 않습니까?
성모님께 주어진 일 역시 성모님의 의지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본인이 원하지도 않았는데, 무조건 주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무게는 너무나 무거웠습니다. 불공평의 상황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받아들이는 모습은 우리와 너무 다릅니다. 불공평의 상황을 불평하는 것이 아니라, 불가능이 없으신 하느님의 일이기에 기쁘게 받아들이십니다. 그 기쁨이 바로 오늘 복음에서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성모님은 사촌인 엘리사벳을 찾아 기쁨을 함께 나누기로 결심하고 발걸음도 바삐 유다의 땅을 향합니다. 서둘러 가려고 그런 것이 아니라, 기쁨이 넘쳐서 발걸음이 가벼웠음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을 잉태해서 무거운 몸이었기에 다리도 아프고 무척 고생스러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성모님의 마음은 기쁘기만 합니다. 기쁨의 성령이 인도하는 발걸음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엘리사벳도 마찬가지입니다. 할머니라 불릴 나이였던 엘리사벳이 앳된 동생 마리아의 방문을 기쁘게 받아들입니다.
이 모든 기쁨이 바로 성모님의 노래로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그렇다면 이 모든 기쁨은 어디에서 시작한 것일까요? 불공평해 보이는 하느님의 일들을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곳에서 시작했습니다. 불평하면서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감사하면서 긍정적으로 바라봤기에 참 기쁨을 간직할 수 있었습니다.
이 세상 안의 불공평을 지금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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