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도로 아내에게 큰 상처를 준 남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아내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주었는지를 깊이 깨달았고, 평소 죗값을 치른다는 마음으로 열심히 살겠다고 아내에게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아내는 남편에게 도저히 용서가 안 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아이 때문에 이혼은 하지 못한다면서도 미움을 겉으로 표시했습니다. 부부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가 보면 주인과 종의 관계처럼 생각될 정도였습니다.
어느 날, 남편은 아내가 너무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나 싶었습니다. 자기 잘못을 꼬투리 잡아 평생 종으로 부리려는 것만 같았습니다.
이제 아내는 남편을, 또 반대로 남편도 아내를 미워하는 관계가 되었습니다. 이 정도 했으면 용서받아야 한다는 원칙이 있을 리 없습니다. 사랑했던 만큼 배신을 느끼면 그만큼의 미움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잘해야 합니다. 그만큼 사랑했었던 것이기 때문입니다.
용서를 받아야 하는 처지에서 용서를 강요해서는 안 됩니다. 용서하는 사람의 뜻에 따라 용서받을 수 있기에, 용서받을 수 있는 계속된 노력만 필요한 것입니다.
주님과 우리의 관계도 이렇지 않나 싶습니다. 즉, 자신의 신앙생활이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잘못한 것은 모두 잊어버리고, 주님께서 주시지 않는 것만을 바라보면서 불평불만으로 가득합니다. 주님과 가까운 사이를 만들 수가 없게 될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할례를 받습니다. 이 할례식 때 일반적으로 이름을 짓는 명명식을 동반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이름은 그 사람 자체를 나타내는 중요한 뜻을 가집니다. 단지 다른 사람과 구별하기 위한 호칭용이 아니라, 일생 동안 그들이 할 사명을 가리키는 일종의 예언적인 성격을 가집니다. 그래서 명명식이 중요했습니다. 그 권리는 부모에게 때로는 친척들에게도 개입할 권리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특별한 사명이 부여되지 않는 한 보통 아버지의 이름을 그대로 전승하는 것이 통례였습니다.
이 통례를 따르지 않고 ‘요한’으로 지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아버지인 즈카르야에게 묻자 글 쓰는 판에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적습니다.
즈카르야는 천사가 일러준 말을 듣지 않아 귀머거리가 되고 벙어리가 되었습니다. 그 기간이 자그마치 1년이었습니다. 그는 그 시간 동안 하느님의 뜻을 새기는 데 노력했고, 더 굳게 믿고 따르는 데 집중했기에 ‘요한’이라고 이름을 지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 뜻을 얼마나 굳게 믿고 따르고 있습니까? 하느님께서 받아주실 때까지 믿고 따라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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