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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12월 25일 _ 조욱현 토마스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1-12-25 조회수 : 856

어젯밤 미사의 전례는 하느님 아들의 탄생 신비에 대한 흥분과 두려움으로 차 있다고 한다면 오늘 낮 미사는 기쁨 외에 서정적이고도 풍부한 신학적 내용으로 차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오늘 본기도는 인간이 마리아를 통해 태어나신 아들을 통해 이미 신성(神性)에 참여하게 되었다는 신학적인 사고를 보여준다. 
 
복음: 요한 1,1-18: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14절)는 말은 단순히 하느님께서 우리와 같은 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단순히 우리와 같은 나약성, 죽음, 한계성, 죄와 더불어 존재해야 하는 일반적 의미보다는, 하느님께서 우리 가운데 항구한 ‘거처’를 실현하셨다고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우리와 함께 계셨다’라는 표현보다도 ‘우리 가운데 그분의 장막을 치셨다’라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이것은 히브리인들이 광야 생활을 한 것처럼, 예수님의 유랑체험 또한 계약의 ‘장막’ 안에서 당신의 백성과 함께 계신 주님의 현존(탈출 25,8; 민수 35,34)을 더 잘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 중의 한 사람이 되어 인간에게 다가오셨다. 
 
그분은 말씀이시며 세상이 창조되기 전부터 하느님과 함께 계신 분이시며, 하느님과 함께 창조주이심을 복음은 고백하고 있다. 즉 나자렛 예수님은 창조주이시기 때문에 강생의 기적 안에서 당신 자신의 작품을 만드신다. 즉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시는 그분이 당신 자신을 시공 안에 가두시는 것이다. 요한복음은 이렇게 하느님의 말씀이 사람이 되신 것을 ‘영광’으로 표현하고 있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 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14절). 즉 하느님 사랑의 위대함은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바로 스스로 낮춤을 통해 들어 높여진다는 사실을 요한은 말하고 있다. 이 낮춤은 십자가에까지 이르게 되고, 십자가가 바로 영광이라고 요한은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영광’은 이렇게 역설적이면서도 결국 모호하므로 사람들은 당황하여 그분을 거절할 수 있다.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11절). 이 ‘백성들’은 예수께서 유다 베들레헴에 빛으로 태어나셨을 때나, 그분의 공생활 동안 그분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은 당시의 유다인들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우리는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발견하고 받아들였는지 자문해야 한다. 우리의 생활 속에 예수님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신앙을 통해 순진한 어린이나, 죄 없는 한 인간을 바라볼 수 있을 때, 우리는 당신의 충만한 은총을 나누어주시기 위해,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자신을 낮추신 그분을 하느님의 아들로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분께서는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당신의 이름을 믿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다. 이들은 혈통이나 육욕이나 남자의 욕망에서 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난 사람들이다.”(12-13절). 즉 우리는 그분을 맞아들임으로써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혈육이나 육정을 통해서가 아니라, 성령의 능력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루카 1,35 참조). 그리고 하느님의 자녀로서 인간은 하느님과의 친교를 가지게 된다. 즉 우리에게 오시는 그분을 맞아들이는 것 자체가 우리에게는 구원의 은총이다. 주님의 성탄 자체가 우리에게 충만한 은총이다. 그 은총은 우리가 그분의 형제가 되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의 아들’이신 당신 자신의 신분을 우리 인간에게 신비스럽게 참여시킴으로써 우리가 구원을 얻게 하신다. 그러므로 성탄 축제는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심뿐만 아니라, 우리 각자가 하느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는 것(로마 8,15.23; 갈라 4,5; 에페 1,5)도 축하해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 아버지의 모습을 알아보게 되었고 우리 자신도 알 수 있게 되었다. 
 
히브리서에서도 그리스도 안에서 결정적인 계시가 이루어진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여기서는 말씀의 위대하심을 알려주고 있다. 이 말씀은 모든 예언자 뒤에 오시며, 그 예언의 완성이시며, 또한 하느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이 세상 만물의 지배권과 상속권을 가지신 분이시다. 바로 이러한 분이 인간의 “죄를 깨끗이 씻어주시기 위해”(히브 1,3) 스스로 낮추셔서 인간이 되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저자 역시 그리스도의 강생 신비는 하느님 아들의 지극한 겸손 즉 낮추심을 의미하지만, 동시에 그분의 사랑을 가장 위대하게 보여주는 행위이며, 그 결과 하느님께서는 가장 참되고 진실한 영광을 받으셨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성탄은 참으로 역설과 모순의 축제라고 할 수 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아들의 지극히 낮추심을 통하여 당신 영광을, 또한 그분의 나약함을 통해 당신의 절대적인 능력을 드러내 보이신다. 신앙은 우리에게 이 모든 것을 통해 하느님의 모습을 발견하도록 도와준다. 즉 하느님께서는 권위로써 당신을 알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단순함을 통해 당신을 드러내시는 분이시다. 진정으로 성탄의 신비는 단순한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얼마든지 체험할 수 있는 신비이다. 매 순간의 삶에 충실하여 그 안에서 성탄의 신비를 체험할 수 있는 은총을 구하면서 이 미사를 봉헌하자. “여러분들 가정에, 우리 가운데 오시는 주님의 풍성한 축복을 빕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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