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때에는 고3 학력고사 체력장이란 것이 있어서, 학력고사 점수에 체력장 만점을 받으면 20점이 가산되었습니다. 그래서 운동장에서 꽤 많은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열심히 하지 않으면 거의 모두가 거저 받는 20점을 못 받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달리기를 정말로 못하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보통 13초 이내로 들어오는 100m 달리기를 매번 16초 이상의 느린 속도로 결승점에 들어왔습니다. 이 친구를 향해 체육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너 열심히 달리지 않을래? 걸어가도 너보다는 빠르겠다.”
이 친구는 정말 열심히 달렸는데 안 되는 것을 어떻게 하냐면서 하소연했습니다.
열심히 해도 안 되는 것은 분명히 있습니다. 그런데 열심히만 해서는 안 되는 것도 있습니다. 즉, 열심히 하지 않고 다른 길을 바라볼 수 있는 시선의 전환이 필요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무조건 열심히 하면 좋은 것으로 착각합니다.
‘열심’이라는 것은 열심히 해야 할 것에 집중해야 커다란 성과를 가져옵니다. 다른 것에 열심히 하면 오히려 잘못된 결과만 가져올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앙인은 어떤 것에 열심히 해야 할까요? 하느님의 일에 열심히 하고, 하느님의 뜻인 사랑을 실천하는데 열심히 해야 합니다.
예수님 시대에 아주 열심히 살았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로 종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열심한 삶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었습니다. 단식, 자선, 기도, 그리고 율법의 준수는 어떤 사람도 따라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열심을 틀렸다고 하십니다. 하느님을 드러내는 것이 아닌, 자기를 드러내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열심’이 사람들은 혼란을 느꼈습니다.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틀린 말일까요? 아닙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산발한 채 이곳저곳을 다니며 이상한 말과 행동을 하는 사람의 말을 그 누가 믿었겠습니까? 의심할 수 없는 진실을 말해도 믿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말에 사람들이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여기에 계시는구나.”라면서 예수님께 최고의 예우를 취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더러운 영이 인정하는 말을 무조건 거부하면서, 예수님의 신원에 대해서도 믿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에 반해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께서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낸다는 말도 안 되는 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당시 종교 지도자들의 열심을 보면서 오히려 굳게 믿었습니다.
잘못된 열심을 보고서 믿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열심, 사랑의 실천을 위한 열심만이 주님을 진정으로 알아볼 수 있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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