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형제님이 오랜만에 애인과 함께 극장에 갔습니다. 서로 회사 일이 바빠서 공동의 취미활동인 영화관람을 오랫동안 못했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영화가 상영한다고 해서, 회사 일을 모두 마치고 밤에 극장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영화를 볼 수 없었습니다. 코로나19로 사회적 거리두기 강화로 10시까지만 극장 이용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오랜만에 데이트를 하는 것인데 너무 화가 났습니다. 더군다나 그 시간에는 식당이나 카페도 이용할 수 없었습니다. 정부의 방침을 비판하면서 불만을 이야기하는데, 여자친구가 공원에 산책하자고 제안합니다. 이 둘은 함께 산책하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눴고, 더 즐겁게 시간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영화관람이 더 큰 기쁨을 줄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만 즐거움을 주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즉, 부정적 감정으로 화를 낼 것이 아니라 새로운 긍정적 방향을 찾는 것이 본인들에게 더 유익했습니다. 누군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외부에서 벌어진 사건이 좋다 나쁘다 하는 문제보다,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처리하느냐가 진짜 중요하다.”
왕실 관리 한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자기 아들이 죽게 되었으니 고쳐 달라고 청하는 것입니다. 이에 “너희는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을 것이다.”(요한 4,48)라고 말씀하십니다. 표징과 이적을 봐야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 있어야 표징과 이적을 체험할 수 있게 됩니다. 아무튼 거절처럼 보이기도 하는 예수님 말씀이었지만, 왕실 관리는 포기하지 않고 조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요한 4,50)라고 말씀하시지요.
이 말을 들은 왕실 관리는 어떠했을까요? 기뻤을까요? 화가 났을까요? 왕실 관리인 자기를 무시한다고 생각해서 화를 낼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생각을 바꿉니다. 화가 나는 부정적인 상황이 아닌, 주님께 대한 믿음으로 긍정적인 상황을 바라봤던 것입니다.
말씀만으로도 살아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집으로 떠나갈 수 있었습니다. 만약 믿지 않았다면, 떠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아들의 생사가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왕실 관리였기에 공권력을 동원해서라도 예수님을 끌고 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믿었기에 떠날 수 있었습니다.
직접 보고 체험해야 믿을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만으로도 자신에게 필요한 은총과 사랑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상상을 늘 뛰어넘는 분이십니다.
주님의 뜻을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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