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친구 사이에 이 정도도 못 해주니? 우리 다시 보지 말자.” 어느 형제님께서 거액의 돈을 빌려달라는 친구의 부탁에 그 정도까지는 도저히 해줄 수 없다고 하자 들은 말이라고 합니다. 한두 푼도 아니고, 집 담보로 해서 대출받아야 빌려줄 수 있는 큰돈이었습니다. 정말로 친하고 귀한 친구였지만, 자신의 영역 밖인 것 같아서 미안한 마음으로 거절했지요. 이 거절에 쏟아진 친구의 말에 죄인이 된 것만 같았습니다.
친한 친구이니 당연히 도와주는 것이 맞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친구를 다시는 못 볼 수도 있습니다. 제 친한 친구가 제게 돈을 빌려달라고 했습니다. 저는 흔쾌히 빌려주었지요. 그 돈을 받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상관이 없었습니다. 친구니까요. 하지만 이 친구를 20년 넘게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제게 미안한 마음이 있어서인지 연락 한 번 하지를 않습니다(연락처가 바뀌어서 저도 연락할 수 없습니다).
사실 친구는 나의 생존이나 경제적 이득에 상관없이, 그저 ‘관계’가 좋아서 곁에 두고 교류하게 되는 사람입니다. 오히려 내 생존과 경제적 이득에 도움을 주는 사람은 친구가 아닌 ‘약한 유대 관계’에 있는 사람이라는 연구 결과도 있습니다.
친구니까, 가족이니까, 부모니까, 자식이니까…. 이런 식으로 가까운 관계를 근거로 자기 어려움을 해결해달라고 청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내 문제를 해결해주는 이로 만나서는 안 됩니다. 대신 좋은 관계에 집중해서 영원히 함께할 수 있는 이로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과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 안에서의 문제 해결을 위한 존재로 만나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 함께 해야 할 분, 특히 영원한 생명이라는 구원의 하느님 나라에서 함께 할 분으로 만나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 3,16)
영원한 생명이 바로 주님께 있습니다. 죽느냐 사느냐가 결정되는 부분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주님과 영원히 함께 할 수 있는 방법을 선택해야 합니다. 단순히 한 번 보고 끝날 관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한 번으로 끝날 관계로 만들려고 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함께 할 분이 아니라, 내 세속적 문제를 해결해주는 해결사 정도로만 생각합니다. 그래서 빛이신 주님과 함께 할 수가 없습니다.
세속적인 문제만 해결해달라고 하면, 함께할 수 있는 깊은 사이가 될 수 없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런데도 왜 주님께 그런 세속적인 문제의 어려움만 이야기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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