숱한 난관과 시련 가운데서도 바르나바 사도의 태도는 일관되게 긍정적이었고 낙관적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사명을 이어갈 직제자들인 사도들을 선택하시는 모습이 참으로 독특합니다.
우리 인간들의 선택 기준과는 사뭇 다릅니다. 누구를 뽑아야 하나, 우리는 즉시 머릿속에 답이 있습니다.
스펙이 좋은 사람, 능력이 있는 사람, 배경이 좋은 사람, 친화력 갑인 사람...
그러나 예수님의 선택 기준은 달랐습니다. 당시로는 무장독립투사였던 열혈당원을 제자단에 가입시켰는가 하면 친일파이자 배신자, 매국노인 세리도 사도로 뽑으셨습니다.
진중하고 헌신적인 사람을 사도로 뽑으셨는가 하면, 좌충우돌에 모난 돌 같은 사람도 사도로 선택하셨습니다.
예수님과 초기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는데 최일선에 섰던 박해자 바오로를 사도로 선택하는가 하면, 오늘 축일을 맞이하시는 모범생 중의 모범생 바르나바를 사도로 뽑으셨습니다.
사도행전의 저자는 바르나바 사도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었는지를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바르나바는 착한 사람이며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수많은 사람이 주님께 인도되었다.”(사도행전 11장 24절)
사도행전 1장 24절을 통해 우리는 배반자 유다의 빈자리를 대신할 사도 한명을 뽑는 과정에서
최종 결선까지 올라갔다가 탈락한 그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바르사빠스라고도 하고 유스투스라는 별명도 지닌 요셉과 마티아
두 사람을 앞에 세우고, 이렇게 기도하였다.”
그러나 아쉽게도 바르나바는 사도들의 제비뽑기에서 탈락해 열두 사도단에 들지는 못하게 됩니다.
그러나 바르나바는 12사도에 포함되지 않은 것에 조금도 개의치 않고 성심성의껏 그리스도교 전파에 투신합니다.
그 결과 12사도에 포함되지 않았지만, 당시 사람들로부터 바오로와 함께 사도라는 칭호를 부여받습니다.
바르나바는 바오로와 함께 열두 사도들에게 소개되었고 그들의 동역자가 됩니다.
특별히 바르나바 사도는 안티오키아 지방 복음화에 1년 이상 헌신하였고, 그 지방에서 많은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였습니다.
특별히 바르나바는 회심 초기 바오로 사도가 곤란한 지경에 빠져 있을 때 그를 많이 도와주었습니다.
그리스도교 박해에 워낙 앞장섰던 바오로 사도였기에 아무리 그가 크게 회심을 했어도
그를 믿어주지 않아 힘들었습니다.
그런 순간 바르나바는 정성껏 그를 보필했고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집회에 그를 모시고 가서 소개하곤 했습니다.
그래서 바르나바 사도와 바오로 사도 사이에는 아주 끈끈한 우정관계가 형성되어 바오로 사도의
첫 번째 전도여행에도 동행하게 됩니다.
그러나 두 번째 전도 여행을 준비하는 과정에 사촌동생 마르코를 선교팀에 포함시키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로 바오로 사도와 견해를 달리하게 되어 결국 바오로 사도와 갈라서게 되어 마르코 복음사가와 키프로스로 돌아오게 되지요.
교회 전통에 따르면 바르나바 사도는 로마, 밀라노 등지에서 복음을 선포하다가 기원후 63년경 키프로스섬 살라미나에서 유다인들의 돌에 맞아 죽음을 통해 순교의 영예를 얻었습니다.
바르나바는 다른 무엇에 앞서 성령과 믿음으로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초세기 교회, 복음 선포 과정에서 직면한 숱한 난관과 시련 가운데서도 그의 태도는 일관되게 긍정적이었고 낙관적이었습니다.
복음 선포 과정에서 겪는 노골적인 적개심, 그리고, 추방 앞에서도 항상 당당했고 기뻐했습니다.
하느님의 성령께서 그의 삶 한 가운데 늘 현존하셨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의 설교와 삶, 지칠 줄 모르는 복음 선포 열정에 큰 감동을 받은 수많은 이교도들이 주님께로 돌아섰습니다.
뿐만 아니라 회심초기 유다인들로부터 심한 배척을 당하던 바오로 사도를 끝까지 지지해주었으며 그의 복음 선포 사업에 성심성의껏 협조함을 통해 초기 교회의 초석을 다지는 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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