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통 체증이 심할 때, 앞의 차가 너무 느리게 가서 계속 다른 차들이 그 앞으로 끼어들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러면 대부분 화를 냅니다. 자기 앞으로 많은 차가 끼어들수록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이 늦어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앞차를 향해 욕을 하기도 합니다. 형편없는 운전 실력으로 길을 더 막히게 한다는 말도 합니다.
자기는 잘한다는 ‘우월함’ 환상에 자주 빠지는 우리입니다. 운전만이 아닙니다. 다른 이를 향한 ‘뒷담화’ 역시 내가 더 낫다는 ‘우월함’ 환상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래의 질문에 솔직하게 답변해보십시오.
“운전을 못 하는 저 사람은 나보다 훨씬 부족한 사람인가요?”
“뒷담화로 비판하는 대상과 나를 비교하면, 나는 대단한 사람인가요?”
나는 낫고, 상대방은 못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사실보다 과장하여 터무니없는 헛된 생각을 하는 과대망상 증세가 있는 것이 아닐까요?
이 증세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주님께 계속 말씀하셨고, 당신의 삶으로 직접 보여 주셨습니다.
나를 낮추는 겸손입니다. 겸손을 통해 ‘판단’보다 ‘이해’를 가져올 수 있고, 이를 통해 우리는 진정한 사랑의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수님 말씀을 통해 하느님 나라가 이미 전개되고 있음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이제 그들에게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의 나라로 들어갈 수 있겠느냐는 현실적인 문제가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한 율법 교사가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던진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신봉하는 율법에 무엇이라고 적혀 있는지를 묻지요. 그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말합니다. 정답이었지만, 그들의 사랑은 제한적이었습니다.
번제물 바치는 것으로만 하느님 사랑을 대신했으며, 이웃 사랑은 동족 사랑에 국한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계명을 하나로 묶으셨지요.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 하느님을 사랑하게 된다는 새로운 가르침을 주시면서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 말씀을 전해주십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겸손한 사람입니다. 자신만을 바라보는 교만에서 벗어나 이웃을 사랑으로 바라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마리아 사람 역시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강도를 만나 길에 버려진 사람을 외면하지 않았고, 여관 주인에게까지 부탁하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사랑을 실천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을 어떻게 실천하고 있었을까요? 사랑을 외면한 사제나 레위인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