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교 들어가기 전에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이 많이 부족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믿음도 부족했고 기도도 잘하지 못했습니다. 그랬기에 신학교에 들어와서도 기도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지루하고 너무 길다고만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기도가 너무 즐겁습니다. 왜 이렇게 변했을까를 묵상해보니,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부족한 ‘나’임에도 당신의 일꾼으로 삼아 이끌어 주신 그분의 사랑, 저의 능력을 당신의 은총으로 채워 주시는 사랑, 신부로 사제서품도 받고 전혀 상상도 못 했던 방법과 장소에서 저를 쓰시는 사랑을 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보이니 기도가 즐거워지는 것입니다. 미사, 기도, 묵상, 성경 읽기 등을 계속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바빠서 기도할 시간이 없다는 말을 저는 믿지 않습니다. 하느님 사랑이 우선되지 않아서, 즉 맨 뒤로 밀려나 기도를 못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날 때, 다른 일이 있으면 짜투리 시간이라도 만들어서 만나거나 그것도 안 되면 전화 통화라도 합니다. 기도라는 하느님과의 대화도 짜투리 시간을 이용할 수는 없는 것일까요?
T.S.엘리엇은 말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잊고서 그분께 기도하기는 어렵다.”
괜히 일 핑계를 대지 말고, 하느님 사랑에 집중해보십시오. 기도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질책하는 장면이 두 가지 경우에 나타납니다. 하나는 위선을 일삼는 종교 지도자를 향한 질책이었고, 따른 하나가 주님의 은혜를 많이 입고도 반대의 삶을 사는 사람을 향한 질책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장면이 바로 두 번째의 경우입니다.
코라진, 벳사이다, 카파르나움, 세 도시는 상업적으로 가장 발달한 곳이었고, 동시에 많은 사람이 있어서 종교 교육이 가장 성행하던 곳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오만과 자기도취로 주님의 가르침을 외면했습니다. 하느님의 능력이 드러나는 기적을 보고도 고개를 돌렸습니다. 그들이 회개하기를 간절하게 원하셨지만, 그들은 끝내 주님께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세상의 것에 관한 관심이 하느님 사랑보다 더 컸던 것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일 때문에 사랑에 집중할 수 없다는 핑계를 대기보다는, 어떻게 사랑할 수 있는 이유를 찾을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하느님과 함께하는 모든 시간에서 커다란 기쁨과 행복을 얻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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