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은 예루살렘 성전의 웅장함과 아름다움을 보고 놀라는 것으로부터 시작되고 있다. 예루살렘 성전은 너무나 아름답고 웅장하여 “예루살렘의 찬란한 모습을 다 보지 못한 사람은 아름다운 것을 보았다고 할 수 없고, 그 성소의 눈부신 장식을 보지 못한 사람은 예루살렘이라는 도시의 매력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사람”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 성전의 파괴를 예고하신다.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6절). 그래서 제자들이 언제 그런 일이 일어나고, 그 징조가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7절), 예수께서는 광신적인 헛된 소리를 조심하라고 하신다.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웠다.’ 하고 말할 것이다. 그들 뒤따라가지 마라.”(8절) 오류를 믿게끔 하는 것은 기만이다. 모든 것이 복음인 양 떠들어대는 것은 사기이다.
그러한 징조를, 위기를 의식하더라도 두려워하지 말고 믿는 마음으로 차분하게 기다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신다. 마지막 때의 모든 불길한 징조 가운데서 한 가지 독특한 사실은 그때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박해를 당하게 되리라는 것이다. 바로 이때가 복음을 증언할 때라고 하신다. 그리스도인은 참으로 종말론적 삶을 살면 살수록 그만큼 강해질 수 있다. “이러한 일이 너희에게는 증언할 기회가 될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명심하여, 변론할 말을 미리부터 준비하지 마라. 어떠한 적대자도 맞서거나 반박할 수 없는 언변과 지혜를 내가 너희에게 주겠다.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13-15.17-19절). 그리스도인은 전쟁과 박해 속에서도 항상 희망을 품어야 한다. 그때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
참으로 종말론적 기다림이란 다른 것이 아니다. 모든 사람과 더불어 하느님 나라의 마지막 한 조각까지 건설하기 위해 그들의 불행과 고뇌와 모순에 철저히 파고 들어가 함께 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마지막 때에야 충만히 완성된다는 것을 굳게 믿고 우리 신앙인들이 현재의 삶에 충실해야 한다. 그 때문에 현세의 삶의 순간들은 하느님 나라를 체험하는 구원을 체험하는 구체적인 장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현실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세상의 빛과 소금 그리고 누룩의 역할을 다해야 한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주님이 오심이 가까웠다고 이 지상의 현실을 멀리하며 계속 불안감 속에서 게으른 생활을 하지 않도록 사람들에게, “일하기 싫어하는 자는 먹지도 말라”(2테살 3,10) 말하고 있다. 바오로 사도는 이 말을 당시의 신자들에게 자주 하였으며, 자신이 그 모범을 보였다. 정말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기다리는 자세는 모든 사람이 더욱 그분의 사랑에 마음의 문을 활짝 열 수 있도록 이 세상의 일에 더 열렬히 참여하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이 항상 자신이 처한 위치와 상황에서 자신이 맡은 책임을 항상 성실히 수행하기를 원하신다. 그러한 삶 속에서 언제나 다가오시는 주님을 그 마음에 맞아드릴 수 있기를 바라신다. 우리는 이러한 깨어있는 삶 속에서 언제나 하느님 앞에 서 있는, 살아있는 그리스도인이 될 것이다. 지금 내가 있는 자리에서 하느님의 자녀로서 최선을 다하며 살아갈 수 있는 우리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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