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33주일
복음을 증언할 때
[말씀]
■ 제1독서(말라 3,19-20ㄴ)
바빌론 유배지에서 귀환한 유다인 공동체는 평화와 행복의 시간들을 기대했으나, 아직 페르시아 제국의 지배를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고 신앙 또한 식어가 형식에 사로잡히기 일쑤였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예언자 말라키는 소리를 높여 이스라엘은 굳건한 믿음과 포기하지 않는 자세로 미래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고 가르친다. 주님의 날은 오고야 말 것이며, 이날 악인은 멸망하고 의인은 구원될 것이기 때문이다.
■ 제2독서(2테살 3,7-12)
주님의 날이 임박했다는 기대 속에 상당수의 데살로니카 신자들은 “무질서하게 살아가면서 일은 하지 않고 남의 일에 참견만 하는” 나약한 신앙 자세, 수동적이며 소극적인 자세를 견지하고자 했다. 사도 바오로는 이와 같은 자세를 질타하면서, 주님의 날을 기다리는 신앙인의 모습은 게으름 없이 매일 매일의 삶에 충실한 삶, 매사에 적극적이며 능동적인 삶이어야 한다고 애써 가르친다.
■ 복음(루카 21,5-19)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현존을 상징하는 성전을 중심으로 세워진 성도(聖都) 예루살렘을 바라보고 계시다. 그분은 자신들의 종교적 제도로 말미암아 폐쇄적 집단이 되어버린 유다교도들에 의해 버림을 받게 되리라는 사실을 의식하고 계시며, 이 버림은 결국 민족의 멸망을 초래하게 될 것임을 내다보신다. 성전의 파괴와 함께 낡은 옛 세상은 종말을 고하게 될 것이나, 새 세상을 맞아들이기 위해 제자들은 또한 갖은 반대와 박해에 직면하고 이를 감수해야 한다. 끝까지 참고 견디는 사람만이 생명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새김]
■ 우리 가톨릭 신앙인들은 성경의 가르침대로 하느님은 선(善)으로 인간과 세상을 창조하셨으며, 창조된 모든 피조물이 당신의 뜻대로 구원되어 평화와 행복의 질서 속에 머물러 있기를 원하시는 분임을 믿어 고백한다. 그러기에 그분의 말씀이 때로 거침없는 질타와 가혹한 응벌을 내용으로 할 때에도, 구원을 위한 회개를 이끌기 위함에 그 목적이 있음을 직시하며 이에 감사하는 마음을 숨기지 않는다. 그러나 문제는 이 구원의 하느님께서 마련해 놓으신 ‘그날’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가에 있다. 상당수의 테살로니카 신자들이 그러했듯이, 일상사를 소홀히 하거나 포기한 상태에서 문자 그대로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것일까?
■ 오늘 성경의 가르침은 분명 ‘아니다!’이다. 주님의 날은 꼭 오리라는 믿음 속에(제1독서) 좌절과 포기의 삶이 아니라, 일상적인 삶의 흐름을 바탕으로 매사에 더욱 충실한 삶(제2독서), 갖은 반대와 박해까지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능동적으로 대처해 나가는 삶의 자세로(복음) 그날을 준비해 나갈 것을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헛되이 내세우는 사람들이 일으키는 혼란 속에서도 흔들림 없이 참고 견디는 사람에게 주님은 분명 생명을 약속하셨다. 매사에 충실한 가운데 복음을 증언하려는 신앙 자세로 이 한 해를 살아왔는지 반성하며, 새로운 신앙의 한 해를 조심스럽게 준비하기로 하자.
교우 여러분, 주님은 참고 견디는 사람에게 참 생명을 약속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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