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회 한일주교교류모임 (1)
“평화를 이루기 위해 역사적 사실을 성실히 마주하고, 기억하며, 다음 세대에 전해야”
제27회 한일주교교류모임(이하 교류모임)이 2025년 11월 18일(화) 일본 히로시마 교구에서 막을 올렸다. 이번 교류모임의 주제는 ‘전후 80년의 흉터와 희망: 젊은 세대에 평화를 연결하기 위해’다. 한일 주교들은 전쟁이 남긴 상처를 기억하며 사흘간의 여정을 시작하였다.

▲ 2025. 11. 17. 한국과 일본의 주교들이 조세이 탄광 희생자 추도비 앞에서 기념 사진을 찍고 있다.
공식 일정에 앞서 일부 주교들은 11월 17일(월), 순례 일정으로 ‘조세이(長生) 탄광 수몰 사고’ 현장을 방문하였다. 이 사고는 1942년 2월 3일에 일본 야마구치현 우베시 해저 탄광에서 발생한 참사다. 태평양 전쟁 시기에 일본이 군수 물자 확보를 위하여 무리하게 채굴 작업을 하던 중 갱도의 천장이 붕괴하며 노동자 183명이 바닷물에 잠겨 목숨을 잃었다. 그중 136명이 일제 강점기에 강제 징용된 조선인 노동자들이었다. 80여 년이 지난 지금도 희생자들의 유해는 바닷속에 남아 있다.
탄광 회사는 사고를 은폐하였고, 일본 정부는 희생자들의 유해 수습을 외면해 왔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일본 시민단체 ‘조세이 탄광 수몰 사고를 역사에 새기는 모임’이 모금을 하며 잠수 조사와 유해 수색을 이어가고 있다. 이 모임의 이노우에 요코 공동대표는 이날 한일 주교들에게 조세이 탄광 수몰 사고의 경위와 모임의 활동 등을 설명하였다. 그는 “우리가 지금 하는 일은 유해를 수습하여 유족에게 돌려보내는 것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일본의 잘못된 역사를 명백히 드러내는 일”이라고 말하였다. 이어 “유골을 수습하고 희생자의 존엄을 지키는 일을 통해서만 정부를 움직이고 이 운동을 계속해 나갈 수 있다.”라며 “2026년 초에 이루어질 유골 발굴에 많은 성원을 부탁한다.”라고 덧붙였다.

▲ 2025. 11. 17. 이노우에 요코 대표가 조세이 탄광 희생자들을 추모해 온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 2025. 11. 17. 한국과 일본의 주교들이 조세이 탄광 희생자 추도비 앞에서 묵념하고 있다.
조세이 탄광 수몰 사고는 강제 징용된 조선인 노동자의 비극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으로, 유해 수습과 사죄 등 인도적 해결은 한국과 일본이 화해와 평화를 이루는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한일 주교들은 전쟁의 참상을 느낄 수 있는 현장을 직접 살펴본 뒤 추도 광장에서 희생자들을 위해 함께 기도하였다. 또한 탄광의 흔적을 알려 주는 표식인 피어(pier, 갱도의 물을 뿜어내는 굴뚝형 구조물)가 보이는 바닷가에 헌화하고, ‘살베 레지나’(Salve Regina)와 ‘고향의 봄’을 노래하며 추모의 시간을 가졌다.

▲ 2025. 11. 17. 한일 주교들이 조세이 탄광 갱도 입구를 바라보고 있다.
<조세이 탄광 수몰 사고 희생자 김원달 씨의 마지막 편지>
어머님 저는 지금 일본 야마구치현이라는 곳에서 탄광 일을 하고 있습니다. 바다 밑으로 갱도가 연결되어 있고 바다 위를 지나는 어선의 통통통 하는 소리가 들려오는 정말로 아주 위험한 곳입니다. 무슨 수단을 쓰더라도 꼭 탈출할 것입니다. 걱정 마세요. 탈출하기가 아주 어렵습니다. 울타리는 3m 정도의 두꺼운 송판으로 만들어져 세워졌고 그 바깥에는 촘촘한 철조망이 쳐져 있습니다. 그 안에 있는 숙소는 마치 포로수용소 같은 곳입니다. 경비가 엄격하고 일절 자유도 없고 외출은 엄두도 못 내는 구속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출입문에는 무장한 경비원이 삼엄하게 지키고 있습니다. 몸 상태가 좋지 않다고 말하면 그날 일을 거부하는 것으로 하여 동물 이하의 것으로 간주하여 폭력을 가하고 밥도 주지 않고 굶기는 일이 허다합니다. 이 편지는 여기에 가족과 같이 거주하고 있는 조선인 노무자에게 몰래 부탁한 것입니다. 그 사람은 가족과 함께 거주하고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간에 반드시 탈출하여 어머니가 계시는 곳으로 돌아가겠습니다.

▲ 2025. 11. 17. 한일 주교들이 피어가 보이는 바닷가를 바라보며 희생자들을 위한 헌화를 준비하고 있다.
11월 18일(화) 첫째 날
교류모임의 공식 일정은 미사로 문을 열었다. 한일 주교들은 첫째 날 오전에 야마구치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기념 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하였다. 미사를 주례한 가쓰야 다이지 주교(삿포로 교구장)는 강론에서 “과거를 돌아보는 일은 미래를 책임지는 일”이라며 “제2차 세계대전이 8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평화를 이루기 위해 역사적 사실을 성실히 마주하고, 기억하며, 다음 세대에 전해야 한다.”라고 강조하였다. 가쓰야 주교는 ‘피폭 80주년을 맞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보낸 레오 14세 교황의 메시지’를 인용하면서 “진정한 평화를 위해서는 파괴를 가져오는 무기를 내려놓을 용기가 필요하다. 세계 곳곳에서 긴장과 갈등이 고조되고 있는 지금, 우리는 상대를 파괴하는 힘으로 안전을 유지한다는 환상을 버리고, 정의, 형제애, 공동선에 기반한 세계의 윤리를 만들어야 한다.”라고 역설하였다.

▲ 2025. 11. 17. 한일 주교들이 야마구치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하고 있다.

▲ 2025. 11. 18. 한일 주교들이 야마구치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한 후 기념 사진을 찍고 있다.

▲ 2025. 11. 18. 야마구치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당 부속 천사유치원 어린이들이 주교단을 환영하고 있다.
오후에는 나카이 준 신부(예수회)가 ‘한국과 일본 천주교회의 가교 역할을 하는 한국 학교: 재일 한국인의 고통에 공감하며 바라볼 수 있는 것’을 주제로 발표하였다. 나카이 준 신부는 일본인으로서 역사 인식이 바뀐 회심의 체험과 함께 조선학교를 통하여 한국과 일본을 잇는 연결고리가 된 경험 등을 나누었다.
조선학교는 해방 후 한국으로 돌아가지 못한 재일 동포들이 모국의 언어와 문화를 지키기 위해 세운 학교로, 현재 일본에 51개교가 있다. 6·25 전쟁 후 남한의 지원은 중단되었고, 일본은 조선학교 폐쇄령과 각종 차별 행위로 이들을 배척해 왔다. 일본의 차별은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2010년부터 시작한 일본의 고교 무상화 정책은 모든 외국인 학교도 포함하지만, 조선학교는 배제한다. 나카이 신부는 “이는 조선학교 학생들을 소외시키고 교육권을 침해하는 행위”라고 지적하였다. 나카이 신부는 “조선학교의 시선에서 보면 일본 사회의 문제점이 드러난다.”라면서 “재팬 퍼스트(Japan first)라는 말이 당연한 표어처럼 사용되고, 외국인을 배제하는 사상이 강한 정당이 힘을 얻고 있다.”라고 우려의 목소리를 냈다.
나카이 신부는 한일 가톨릭 교회가 연대하여 재일 동포와 같이 소외된 이들을 돕는 네트워크를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그는 가톨릭평화신문, 의정부교구, 남녀 수도회 등의 도움으로 조선학교 학생들을 지원하고, 비자가 만료된 재일 동포 부부의 한국 정착 등을 도운 사례를 소개하였다. 나카이 신부는 “한일 교회가 신뢰의 네트워크로 연결되면 더 많은 생명을 도울 수 있다. 양국 교회가 인적·물적 투자를 하며 가시적인 협력 구조를 만들어가고 양국 사이에 놓인 벽을 뛰어넘을 수 있기를 바란다.”라는 소망을 밝혔다.

▲ 2025. 11. 18. 한일 주교들이 히로시마 리가 로얄 호텔에서 개회식을 하고 있다.

▲ 2025. 11. 18. 나카이 준 신부(왼쪽에서 두 번째)가 강의를 하고 있다.
이기헌 주교(전 의정부교구장)는 “일본에서 사목한 경험이 있기에 조선학교에 특별한 마음을 가지고 몇 차례 도움을 준 적이 있다.”라며 “조선학교가 일본 사회에서 가장 큰 아픔을 지닌 단체인 만큼 한국 주교님들이 많은 도움을 주시고, 일본 주교님들도 조선학교에 특별한 관심과 따뜻한 마음을 가져 주시길 바란다.”라고 말하였다. 이 주교는 또 “우리가 이런 주제들을 다루는 것은 한일주교교류모임의 결실이며, 복음적인 시간”이라고 밝혔다.

▲ 2025. 11. 18. 한국 주교들이 강의 후 질의응답을 하고 있다.
교류모임은 20일(목)까지 이어진다. 한국 측에서는 조환길 대주교(대구대교구장), 옥현진 대주교(광주대교구장, 한일주교교류모임 연락 담당), 주교회의 의장 이용훈 주교(수원교구장) 등 주교 17명, 일본 측에서는 마에다 만요 추기경(오사카-다카마쓰 대교구장), 나카무라 미치아키 대주교(나가사키 대교구장), 우메무라 마사히로 주교(요코하마 교구장, 일본 주교회의 부의장), 시라하마 미쓰루 주교(히로시마 교구장) 등 주교 16명이 참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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