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제준 이냐시오 성인 묘 찾기 위원회(가칭, 이하 김제준 성인 위원회) 회의가 3월 3일 용인대리구청 회의실에서 열렸다. 용인대리구장 김학렬(요한 사도)신부를 비롯한 용인대리구 사제단 6명과 김제준 성인 위원회 관계자들이 모인 가운데 열린 이번 회의에서는 지난 회의(2009년 2월 11일)에서 논의된 대로 성인의 묘가 있을만한 곳을 팀별로 탐색한 결과를 발표하고, 김학렬 신부가 발췌한 사료를 통해 성인의 묘 위치를 추측한 내용을 설명하는 시간을 가졌다. 또한 위원회는 앞으로 지속적으로 팀을 이루어 탐사와 발굴작업을 해 나가기로 결정했다.
김제준 성인의 실묘를 찾기 시작한 시점은 199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성 김대건 신부 가족 족보에 의해 묘 소재지가 양지 서면에 있다는 기록 '묘양지서면 자좌((墓陽智西面 子坐)'에 의거, 1996년 11월 미리내 경당 앞에서 첫 탐사작업을 시작해 2003년까지 김제준 성인의 옛 거주지 주변 지역과 주요 활동 범위였던 지역, 무명 순교자들의 묘를 발굴했던 지역을 토대로 성직자와 수도자, 평신도들이 참여해 15회 가량 탐색해 왔으나 아직까지 찾지 못하고 있다. 이같은 어려움을 겪는 이유는, 성인에 관한 유일한 기록이라고 할 수 있는 족보에 기록된 묘 소재지가 양지 ‘서면’이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양지에는 서면이라는 지역이 예전이나 현재나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2시간가량 회의를 주관한 김학렬 신부는 앞으로의 탐사지역을 설명하느라 펼쳐놓았던 지도를 다시 접으며 “희망을 갖고 계속 찾자”는 의지의 말을 남겼다. 위원회는 사순기간동안 꼭 실묘를 찾아, 부활 때 함께 기쁨을 나눴으면 하는 바람으로 또다시 탐사를 나설 예정이다.
10년이 넘게 실묘 찾기에 열정을 바쳐온 이 위원회의 회장이며 한국 순교자 현양회 시복 분과장 김진용(마티아) 씨는 ‘실묘중인 성 김제준 이냐시오 묘 소재지에 관한 연구’라는 자신의 글에서 “성 김제준 이냐시오의 묘는 1839년 순교한 이래 170년이 경과됐다. 박해 시대에 순교한 분의 유해를 남의 눈을 피해가며 몰래 썼으며, 장례에 참석한 인원이라야 불과 극소수의 인원으로 일을 치렀을 것인 즉, 결국 묘의 규모가 대단히 초라했을 것이고, 그나마 170년 동안 제대로 돌보지 않은 상태이니 오죽하랴? 묘의 형태조차 제대로 남아 있을까 걱정된다. 그러나 정남향묘라는 것만은 잊지 말아야 한다(1998.2).”라고 밝히고 있다.
103위 성인 중 한 명인 성 김제준 이냐시오(1795-1839)는, 성 김대건 신부의 부친으로 기해박해 때에, 그의 사위와 배교자 김순성(일명 김여상)의 안내를 받은 관헌들의 손에 체포되어, 무수한 혹형을 받고, 1839년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참수치명하였다. 그는 1814년에 해미에서 옥사 순교한 김진후 비오의 손자로 1795년에 출생하여 충남 당진국 우강면 송산시 솔뫼에서 살다가, 1827년경 정해박해를 피해, 온가족이 서울 청파동을 잠시 거쳐, 용인 한덕동과 묵리 굴암, 그리고 골배마실등지에서 살았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그의 부인 고 우르슬라는, 1846년 새남터에서 순교한 후 미리내에 안장된 그의 아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묘의 조금 아래에 있던 교우 공동묘지에 안장되었지만, 안타깝게도 성 김제준 이냐시오의 묘는, 순교 후 170년이 경과된 오늘에 이르기까지, 아직 그 소재조차 파악되지 않고 있다.
이상숙 명예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