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계단을 내려갑니다. 하나 두울…. 이제 바닥이예요. 조심하세요…'
'고맙습니다'

봉사자의 손을 잡고 나선 성지순례길, 가까운 성지마저 직접 찾아가지 못해 늘 안타까웠던 시각장애인 임영희(루시아) 할머니는 여느 때와는 다른 가뿐한 마음으로 따뜻한 봄볕 속에 순례에 나섰다.
5월 9일 오전 충남 아산시 인주면 공세리성지. 순례객들 틈에 끼어 성지를 오르는 한 무리의 행렬이 눈길을 끌었다. 하안본당 실로암장애인 공동체가 휠체어와 지팡이, 그리고 그보다 더 의지가 되는 비장애인 봉사자들과 함께 성지를 순례하고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필요한 것들을 챙기고 일일이 실로암 공동체원들의 집을 방문한 봉사자들 덕분에 이 날 순례에는 25명 정도가 동참할 수 있게 됐다. 짧다면 짧은 하루의 시간이지만, 이들은 아름다운 성지에서 비장애인들과 똑같이 미사도 봉헌하고 온몸으로 자연을 만끽하며 삶을 묵상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몸은 좀 불편하지만 영적 성장에 대한 갈망은 누구보다 큰 실로암 공동체 회원들은 성지에 활짝 핀 다양한 꽃들의 잔치에 “마치 하늘나라에 온 듯하다”며 기뻐했다. 시각장애를 가진이들은 마음의 눈을 통해 성지에 새겨진 순교자들의 발자취를 느꼈고, 지체장애인들은 평소 자주 찾지 못하게 되는 성지 곳곳을 하나하나 담는 듯했다. 함께 바치는 십자가의 길 기도는 그 어느 때 보다 경건했다.
실로암 공동체 이상철(스테파노) 회장은 “장애인들은 혼자 행동하기가 불편해 누구 못지 않게 성지순례에 마음이 있어도 나설 마음을 선뜻 내기가 힘든 게 현실”이라며 “이런 기회가 자주 마련된다면 장애인들에게 순교신심을 함께 나누고 널리 전하는데 큰 힘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자리에 여러분이 오게 된 것은 순교자들의 삶을 보여 주기 위한 주님의 초대 이기에 “이 은총의 기회를 놓치지 말고 희생과 봉사로 하느님께 받은 것을 돌려 드리는 참된 신앙인이 되자”고 당부한 공세리성지 김찬영(베드로) 신부의 강론 말씀이 실로암 공동체 안에 의미있게 머물렀다.
최효근·성재필 명예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