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3시 알람이 울렸다.
생전 처음으로 어제 저녁 9시 좀 넘어서 잠을 청해서 잠을 설치다가 일어나려니 몸이 무거웠다. 하지만 프란치스코 교황님을 만난다는 기쁨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씻고 준비하고 3시 30분에 집 주차장으로 나가니 벌써 지역식구들이 나와 계셨다. 모두들 조금은 피곤해 보였지만 교황님을 만나러 간다는 사실에 마음이 들떠 있었다.
새벽 4시 10분 전 안산 중앙역에 도착하니 많은 본당 신자들이 도착하여서 지역별로 나누어주는 주먹밥과 간식, 비표 등을 배부 받고 있었다. 역사엔 거의 우리 천주교 신자들뿐이었다. 30분쯤에 서울로 가는 열차가 들어왔다. 열차 안으로 들어서니 벌써 안산역과 초지역, 고잔역에서 탄 다른 성당 교우들이 자리를 다 차지하고 있어서 우리는 문 앞에 돗자리를 깔고 앉았다. 그리고는 이른 아침인데도 모두들 주먹밥을 꺼내어 먹었다. 역마다 천주교 신자들로 북새통을 이루어 결국은 모두들 일어섰지만 많은 신자들로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래도 짜증나기보다는 모두들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났다. 평촌역에서는 젊은 신부님도 타 혼잡한 전철 안에서 제의가 든 가방을 메고 계셨다.
그렇게 40여분을 달려 서울 회현역에 도착하니 새벽 5시 50분, 본당 조장들의 안내로 광화문 시청 앞으로 20여 분쯤 걸어가니 입구에서부터 한국은행까지 쭉 줄을 선 많은 신자들이 보였다. 그렇게 지루하게 또 30여 분을 줄을 선 후, 시청 앞 지정장소에 들어가기 전에 경찰관들에게 주민등록증과 비표를 보여주었다. 그 검사가 끝나니 이젠 소지품 검사를 한다고 몸을 탐지기로 구석구석 탐지했다.
이제는 자리를 찾아서 또 10여분을 소비하고 나니 ‘아! 우리 월피동 본당은 시청 앞 세월호 분향소가 있는 자리 그것도 노란 리본이 물결치게 묶여져 있는 곳’이었다. 난 모든 수색이 끝난 후 시청으로 들어선 순간, 노란 리본이 물결치는 그곳이 세월호 희생자와 실종자 가족들의 자리인줄 알았다. 그런데 이 자리가 우리 본당 그리고 내가 앉는 자리라 처음에는 몹시 당황했었다. 그러나 차츰 이 자리가 하느님께서 미리 마련하신 자리란 걸 깨달았다. 다른 지역보다 그래도 안산에서는 세월호 가족을 위로해주는 미사가 화랑유원지 분향소에서 아직도 계속 봉헌되고 있고 그들의 아픔을 늘 함께 해 왔기에 이 자리가 수원교구에서도 안산대리구 1지구에게 정해진 것은 아닌가 생각되었다. 묵주 기도가 끝난 후 화장실 이용하기 위해 시청 본사로 갔더니 화장실 이용 후에는 다시 입구에서 또 다시 비표와 주민등록증 확인과 몸수색 후에 입장할 수 있었다. 이어서 간식으로 조금 요기 후에 전광판으로 교황님께서 서소문 참배하며 기도하는 모습을 보았다.
갑자기 시청 앞 광장에서 “비바 파파” 라는 소리가 울려 퍼지고 신자들의 일제히 “와!” 하는 함성 소리가 들려와 그쪽으로 고개를 들어보고 까치발을 들고 보러하였다. 하지만 교황님은 보이지는 않았다. 나는 환호 소리와 열기에 가슴이 뭉클하며 흥분되어 나도 “비바 파파”라고 외쳤다. 이어서 시작된 124위 시복식이 이루어지는 순간 눈물이 핑돌고 가슴이 뭉클함을 느꼈다. 또 미사 내내 하늘엔 구름이 해를 가려주었고 시원한 바람도 살랑살랑 불어주어 넘 축복된 시간임을 체험하였다. 교황님과 한 공간에서 함께 숨 쉬고 미사를 드리고 있다는 것에 가슴 벅찬 하루였다.
18일. 지난 16일 시복식과 광화문 미사에서 교황님을 가까이 뵐 수 없었음에 아쉬움을 새벽 미사 중에 하느님께 토로하였다. 교황님을 삶을 본받고 그분의 길을 따라 걸어가려면 교황님을 가까이에서 뵙고 손이라도 잡고 싶다고 아니, 먼발치라도 교황님을 뵙기를 희망한다고 토로 하였더니 갑자기 아침에 평화와 화해의 미사가 열린다는 명동성당으로 향하는 은총의 시간이 주어졌다.
원래 이날 아침에는 본당 탈출기 성경공부 봉사자로 활동하는 시간이라 가고 싶어도 희생봉헌하고 말씀공부하려고 했다. 근데 갑자기 많은 분들이 성경공부를 나오지 못하게 되는 일이 생겨서 그룹공부를 못하게 되었고, 그룹원 반장과 그룹원 한명이 즉석에서 교황님이 미사 드리고 있는 명동성당에 가자고 하여서 이루어졌다.
명동성당엔 많은 인파가 비가 오는데도 교황님을 좀 더 뵙고 싶다는 열망으로 성당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난 성서 가족과 명동성당에 도착하니 막 교황님께서 떠난 자리엔 아직도 많은 인파로 술렁거리고 있었다. 명동성당으로 들어가니 많은 분들이 기도하고 있었으며, 많은 신자들은 한 외국인 사제에게 안수를 받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그 자리에 줄을 서서 기다렸다가 안수를 받았다. 가슴이 너무 벅찼다. 교황님이 머물다 간곳, 아직도 그분의 체취가 남아있는 명동성당에 내가 지금 서 있다는 것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비록 가까이에서 그분을 만나 악수와 눈인사는 못했지만 교황님과 함께한 장소에서 함께 마음을 나누는 시간이 되었다. 교황님이 떠난 빈 마음을 명동성당 지하에 보관된 성인들의 유해가 있는 지하 성당에서 잠시 그들을 되새기며 기도의 시간도 가졌다. 지금 교황님은 한국을 떠났지만 교황님의 여파는 여전히 내안에 살아있음을 체험하였다.
비록 교황님을 가까이에서 뵐 수는 없었지만 교황님이 나에게 주시는 메시지는 많다. 그 중에서 제일 가슴에 와 닿는 말은 '가난한 자와 고통 받는 사람과 함께 하라'였다. 교황님은 가난하고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모습이 너무 인상적이었다. 몸짓과 눈짓으로 위로를 건네는 언어, 어떠한 말보다 아파하는 사람들을 보면 다가가서 눈빛으로 같이 아파함을 보이고 손을 잡아준다든지 안아주면서 몸짓으로 위로해주는 언어를 사용하였다.
나도 이제부터는 아파하는 사람들에게 다가갈 때 교황님처럼 몸짓과 눈짓 언어로 다가가야겠다. 교황님은 모든 순간의 행동이 계산 없이 순리대로 몸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셨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과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다가가시는 점을 본받고 싶다. 또 나에게 전해주는 메시지는 언제나 낮은 자세로 살아가며 가난하게 살아가고 정의로운 일에 침묵하지 않고 그들의 대변인이 되어주는 것이다. 교황님은 아픔을 지니고 있는 세월호 희생자와 실종자 가족들에게 따뜻한 위로와 그들의 벗이 되어주러 노력하는 점이다. 세월호 희생자 가족들의 요구가 무언지 깨닫고 그들에게 위로와 희망과 용기를 주는 점이다. 나도 이제는 세상의 정의로운 일에 용기를 지니고 투신하여야 함을 깨닫는다.
박명영 명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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