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여행이 하고 싶었다. 거추장스러운 것 없이, 홀로 조용히 있을 수 있는 그런 여행이 하고 싶었다.
그런 내게 스페인의 산티아고로 향하는 순례길은 제격이었다. 그냥 그런 길이 있다고만 알다가 책을 읽고 인터넷 검색을 통해 사람들의 이야기를 볼수록 마음은 요동쳤다. 직장, 부모님의 동의, 성당 봉사, 개인적인 일 등이 정리가 되어야 했고 쉬운 일은 분명 아니었다.
작년 수원교구 성경잔치에서 모든 행사와 미사를 마치고 나오는데, 총대리 이성효(리노) 주교님께서 안수를 주고 계셔서 막 달려갔다.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이고는 ‘하느님, 제가 세상에서 가고자 하는 길에 축복을 내려 주세요. 저를 산티아고로 보내주세요.’라 청했다.
그리고 나는 정말로, 2015년 2월 17일 파리로 향하는 비행기에 오를 수 있었다.
스페인 산티아고로 향하는 길은 여러 개가 있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프랑스의 길’이라 불리는 경로를 택한다. 나의 선택도 그러해서 파리로 들어가 2월 18일 재의 수요일에 노틀담 성당에서 미사를 드리고 하루를 더 지낸 다음 기차로 바욘, 다시 버스로 ‘프랑스의 길’의 시작 지점인 생 장 피드포트로 갔다.
첫 날 숙소에서 만난 사람들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전체 일정에 대해 대강의 그림을 그려놓고, 무거운 배낭에서 그나마 덜 필요한 것들을 버리고 여분의 운동화도 과감히 버려 무게를 7kg으로 만들어 놓고 잠을 청했다.
순례길은 800km정도에 달한다. 그러나 평소 잘 걷지 않는 나는 그 거리가 얼마나 되는 지 잘 알지 못했다. 그저 내가 걸어야 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겨울이었기 때문에 눈이 오면 눈이 오는 대로, 비가 오면 비가 오는 대로 그저 조가비와 화살표를 따라 걸었다. 발에 바셀린을 바르고 양말을 두 겹씩 신었지만 눈과 비로 신발이 젖었고 난방이 약해 잘 말리지 못한 상태로 긴 거리를 다시 걸어야 해서 발가락에 물집이 금세 올랐다. 양 발에 6~7개의 물집을 가지고 걷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 산을 오르거나 자갈과 돌이 잔뜩 깔린 내리막을 걸을 때에는 참으려 해도 온갖 비명이 다 튀어나왔다.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찬 눈으로 길게 난 길을 바라보며 절룩이는 다리로 겨우 걸어 목적지에 도착하기를 반복했다. 이렇게 힘들게 걷다가 저녁에 성당에 가게 되면 그 미사가 그렇게 달지 않을 수가 없다. 달디 단 미사 안에서 모시게 되는 성체는 또 얼마나 뜨겁던지.
체력적으로 많이 힘들었던 초반의 열흘 정도가 지나자 몸이 서서히 적응하기 시작했다. 발가락의 물집들도 아물어가고 퉁퉁 부은 발의 고통에도 익숙해졌다.
매일 20km 전후의 거리를 걷다보니 속도도 제법 나 중반부터는 25km 전후를 걸을 수 있게 되었다.
3월이 되니 산티아고 순례길에도 봄이 왔다. 꽃들이 피어오르고 하늘은 파랬다. 혼자 걷기 시작했지만 어느새 여러 친구들이 생겨서 서로의 이야기도 나누고 길에서 함께 쉬며 빵도 나누게 되었다. 각자의 이야기를 가지고 온 사람들이 같은 순례길을 걸으며 비슷한 경험들을 하면서 스치는 순간에도 마음을 담아 함께 즐거워하고 기뻐하고 필요할 땐 아낌없이 도움을 주는 일은 순례자 모두가 신기해했다. 그래서 우리는 더 행복했다.
‘과연 여기까지 갈 수 있을까?’ 자신이 없었던 ‘레온’이라는 큰 도시에 도착하게 되었다. 21일 째였다. 멀리서 도시가 눈에 들어오자마자 나도 모르게 두 손을 번쩍 들고는 소리를 질렀다. 이제 후반기에 접어들었다는 표시이며 지금까지 잘 버텨온 내 자신에 대한 기쁨이었다. 이쯤 되면 제법 나름의 노하우가 생겨서 1시간 걷고 10분 쉬며 걸어오던 거리를 2시간 정도는 무난하게 걸을 수 있었고, 물집이 생기면 과감하게 터뜨려 물을 빼고 밴드로 감아 발끝을 꾹꾹 눌러 고통을 가늠하고는 다시 걸을 수 있게 되었다. 등산 스틱이 없이도 오르막이건 산이건 쉬 오를 수 있었다. 27일 째에는 왼쪽 새끼발가락 발톱이 빠진 것을 발견했는데, 순례를 마친 누군가의 글에서 발톱이 빠졌다는 이야기를 이미 본 적이 있어서 ‘나도 드디어 발톱이 빠졌구나! 나도 꽤 고생했구나!’라는 생각에 뿌듯해 했었다.
하루하루가 더 소중해졌다. 매일 행복한 이 길을 걸을 수 있는 날이 줄어들수록 아쉬움이 커지면서도, 매일 묵주기도를 하며 생각했던 나의 사람들이 더 보고 싶었다. 카미노에서 정말로 행복했는데, 카미노에서 본 이곳(내가 살 던)에서의 내 모습도 참 행복해 보였다. ‘나 참 잘 살았구나, 나는 내 가족, 친구, 동료, 교우들, 신부님, 그 외 마주치던 많은 사람들 덕에 정말 행복하게 살아 왔구나.’ 이렇게 생각하니 카미노에 머무르고 싶은 마음과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함께 커져서 굉장히 복잡한 심경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 길을 걸으며 했던 많은 생각들과 하느님께서 주신 이야기들과 성모님의 사랑이 커다란 우주의 형태로 내 머리 위를 감싸는 기분이었다. 체력은 더 좋아져서 발걸음은 가벼웠으나 머리와 마음이 커질 대로 커져서 역시 쉬운 날은 하루도 없게 되었다.
산티아고로 들어가는 마지막 날이 왔다. 많은 친구들과 밝은 얼굴로 ‘드디어 산티아고를 간다’며, 오늘 만큼은 무리를 지어 다 같이 이동하기로 했다. 숙소를 나서기도 전에 눈물이 났다. 한 발 한 발, 발 아래로 카미노를 느끼며 걸어 순례의 목적지인 산티아고 데 곰포스텔라 성당에 들어가게 되었다. 막상 도착하니 덤덤하다. 성당을 둘러보고 아침을 먹은 후 순례 인증서를 발급받고 정오에 열리는 순례자를 위한 미사에 참석했다. 미사 전에 고해성사를 하려는데 시원치 않은 영어로 하니 신부님께서 ‘나는 알지 못하지만 하느님께서는 다 아시니 한국어로 편하게 고해하라.’고 말씀해 주셨다. 정말 편한 마음으로 두 눈을 감자마자 눈물이 뚝뚝 떨어진다.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지금까지 성찰했던 죄의 용서를 청하고 카미노를 걷게 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를 드렸다. 그리고 카미노의 친구들과 미사를 드리고 평화의 인사를 나누고 여기까지 걸어온 모든 날을 하느님께 봉헌하며 33일 간의 산티아고 순례를 마쳤다.
김정미(베로니카·곤지암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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