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한국 기법 절충한 건물 독특
항일운동·교육 등 지역사회 선도
▲ 안성성당 마당에 서면 현재 사용 중인 새 성당(왼쪽)과 1922년 설립된 옛 성당(오른쪽)이 동시에 눈에 들어온다.
평택대리구 안성본당(주임 박요셉 신부)은 100년이 넘는 시간에 걸쳐 지역사회와 긴밀하게 소통하면서 하느님의 사랑을 전해온 본당이다.
‘포도’는 안성의 명물 중 하나다. 이 안성포도는 본당이 지역에서 실천해온 사랑의 산 증인이다. 안성포도가 본당의 초대주임 공베르 신부가 일군 텃밭에서 시작됐기 때문이다.
1900년 10월 안성본당이 설립되고 공베르 앙트완(Gombert Antoine, 1875~1950) 신부가 파견되자 지역민들은 신부를 불청객으로 여겼다. 신부의 거처를 파괴하거나 직접 해하려는 사람까지도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공 신부는 본당을 거점으로 하느님 말씀을 전하면서 가난한 이들에게는 음식을, 아픈 이들에게는 약을 나누는 등 적극적으로 사람들에게 다가갔다.
가난한 지역민의 자립을 위해 고민하던 공베르 신부는 미사주를 만들기 위해 심은 포도나무가 잘 자라는 것을 보고 안성지역이 포도농사에 적합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신부는 안성의 토질과 기후에 적합한 포도종자를 찾아 32차례나 프랑스를 오가며 실험 재배했다.
이어 성당 주변 토지 50만 평을 매입해 지역사람들이 경작할 수 있도록 임대하면서, 신부는 지역의 존경을 받는 유지가 됐다.
본당은 지역사회의 요청에 부응해 교육사업에도 뛰어든다. 교육은 선교로 이어질 뿐 아니라 우리나라가 일제에서 벗어나 국권을 회복하는데도 도움이 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렇게 설립된 것이 지금까지 이어져 오는 안법고등학교다.
본당 설립 후 이토록 다양한 사업을 펼칠 수 있었던 것은 깊은 신앙의 역사가 밑바탕이 됐기 때문이다.
안성지역에는 이미 박해시대에 교우촌이 형성됐다. 이 신자들을 사목하기 위해 1883년 ‘바울 공소’를 설립한 것이 오늘날 본당의 기원이 됐다.
본당은 1919년 3·1운동 때 만세를 부르다 왜경에게 쫓기던 사람들을 보호했고, 가난한 소작농에게 전답을 나눠 도왔을 뿐 아니라 흉년에 양식을 나눠주기도 했다.
1922년 세워진 성당에서는 지역과 일치하려는 본당의 마음이 드러난다. 성당은 프랑스 바실리카 양식과 우리 전통의 목조기법을 절충해 설계됐다. 이 성당은 경기도 지방문화재 기념물 제82호로 지정돼 지금도 보존돼 있다.
본당은 1970년 대천동본당을 분가시키면서 구포동본당으로 개칭됐다. 2000년 본당 설립 100주년을 기념하던 본당은 다시 본당이름을 안성본당으로 되돌리고 기념성당을 봉헌했다. 현재 안성성당을 찾으면 옛 성당과 현대적인 건축의 새 성당이 나란히 마주한 모습을 볼 수 있다.
▲ 프랑스 바실리카 양식과 한국 전통의 목조기법을 절충해 만들어진 옛 성당.
이승훈 기자 (joseph@catimes.kr)
가톨릭신문 자료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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