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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구소식

교구아들 바오로와 함께 하는 한국 천주교 성지순례 7

작성자 : 홍보전산실 작성일 : 2016-09-20 조회수 : 1174



   7월 22일, 아들 바오로와 한국 천주교 성지 순례 일곱 번째로 찾은 곳은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에 있는 남한산성순교성지이다. 이번 순례에는 방학을 한 막내 중학생 딸 유스티나도 따라나섰다.

 

   남한산성순교성지에 도착하니 기와집으로 지어진 전통 한옥 성당 건물이 이색적으로 다가와 좋았다.

입구 맞은편으로는 기해 및 병인박해 때 순교한 수백 명의 넋을 기리는 순교자현양비가 높게 세워져 있었다. 현양탑은 순교자들이 옥에 갇혀 목에 썼던 칼 모양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먼저, 순교자현양비 앞에서 신앙을 위해 목숨을 바쳐 순교하신 분들을 위한 기도를 바치고는 한옥으로 된 성당에서 잠시 성체조배를 했다. 주님께서 성지를 찾은 아들 바오로와 유스티나와 함께 하여 주시기를 위한 청원기도를 바쳤다.


   성당 앞 성모상 앞에는 맑은 샘물이 있어서 뜨거운 날씨에 성모님처럼 포근한 단물이 되어주었다. 성모님께 바오로와 유스티나를 전구하는 기도 후 계단으로 올라가니 성모님과 함께하는 십자가의 길이 나왔다.


   십자가의 길이 푸른 숲으로 우겨진 숲길로 되어 있어서 가족 피정 온 기분으로 십자가의 길을 바쳤으며, 맑은 산속 공기를 맡으며 바치는 십자가의 길에 정신도 맑아졌다. 십자가의 길을 하는 이 시간 한낮의 뜨거운 날씨임에도 나무 그늘이 되어 산그늘을 만들어주는 성모님과 예수님의 손길을 느끼는 십자가의 길이라 더욱더 은혜로웠다.


   남한산성은 한양의 군사적 요지로 천주교 박해와 밀접한 관련을 맺게 되었는데, 이미 최초의 박해인 신해박해(1791년) 때부터 신자들이 남한산성에 투옥되었다는 전승이 내려오고 있으며, 신유박해 때에는 최초로 순교자 한덕운 토마스가 탄생하였다.

   이어 기해박해와 병인박해에 이르기까지 약 300명에 달하는 천주교 신자들이 참수, 교수, 장살 등의 방법으로 순교하게 되는데, 안타깝게도 순교하신 분들 가운데 일부분만이 알려져 있을 뿐이다.


   병인박해 때에는 ‘백지사’라는 특이한 형벌이 이곳에서 시작되었는데, 이것은 사지를 묶고 얼굴에 물을 뿌린 뒤에 한지를 덮는 일을 거듭하여 숨이 막혀 죽도록 하는 형벌이다. 너무 많은 신자들이 잡혀오자 피를 보는 일에 진저리를 낸 포졸이나 군사들이 쉽게 처형할 수 있는 방법으로 고안해 낸 형벌이 바로 백지사형이다.


   순교자 가운데 행적이 밝혀진 분은 최초의 순교자인 복자 한덕운 토마스를 비롯하여 김성우 안토니오 성인의 일가인 김덕심 아우구스티노, 김차희, 김경희, 김윤희와 이천 단내 출신 정은 바오로, 정 베드로 등 36명에 이른다.


   남한산성은 신유, 기해, 병인박해를 통해 300여 명의 순교자가 탄생한 곳으로 한강 이남 경기지역 교우들에게는 ‘잊을 수 없는 순교터’다.


   남한산성이 천주교의 성지가 된 이유는 남한산성에 광주부의 치소(治所, 어떤 지역의 행정 사무를 맡아보는 기관이 있는 곳)가 되고 나아가 광주가 부윤으로 승격되고 1695년(숙종 21년)부터 토포사를 겸하면서 형장의 장소가 되었기 때문이다.


   토포사는 반역도당들을 토벌하고 떼강도와 같은 큰 도적을 잡는 일을 직임하는 관리였다. 남한산성의 토포사는 광주 고을의 치안을 맡으면서 동쪽으로는 양근의 용진, 서쪽으로는 안산의 성곶이, 북쪽으로는 한강, 남쪽으로는 이천, 여주, 양지, 용인에 이르는 고을 안에서 강도나 역도들을 섬멸하는 역할을 했는데, 천주교 박해령이 내려지면 토포군관들은 위의 지역으로 나가 천주교 교우들을 잡았던 것이다.


박명영 가타리나 명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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