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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구소식

교구아들 바오로와 함께 하는 한국 천주교 성지순례 9

작성자 : 홍보전산실 작성일 : 2016-10-07 조회수 : 1184

   7월 31일. 아들 바오로와 한국 천주교 성지 순례 아홉 번째로 찾은 곳은 경남 마산교구 밀양에 있는 명례성지와 복자 박대식 묘, 복자 신석복 묘지이다.


   이번에는 거제에 사는 오빠 집으로 가족이 휴가를 떠난것을 계기로, 진영에 있는 친구도 만날 겸 밀양 인근 성지를 돌아보기로 하였다.


   아침 일찍 안산을 출발한 가족은 우리나라에서 제일 더운 날, 제일 더운 지방인 밀양에 제일 더운 한낮인 1시에 도착했다. 차 문을 여는 순간 ‘푹 푹’ 찌는 더위가 엄습해왔다.

   한반도에 열대야가 보름 넘게 계속되고 있는 날에 성지를 찾은 우리 가족은 더워서 땀을 줄줄 흘렸지만, 강가 나지막한 언덕에 자리한 명례성지를 찾아 계단을 올라가니 성지 담당 신부님과 수녀님께서 땀에 젖은 모습으로 우리 가족을 반겨주었다.


   아들 바오로와 딸 유스티나가 이 더운 날 물놀이 가지 않고 성지를 찾아 순례를 한다고 칭찬해주시며, 성지를 찬찬히 돌아보고 성당에서 더위도 식히고 가라고 하셨다.


   천주교에서는 영적 고향으로 간주되는 명례성지는 역사를 담고 있어 그런지 고풍스런 분위기를 느꼈으며, 순교자들의 영성이 묻어 나옴을 느꼈다.


   더운 날 성지를 찾아온 우리 가족을 포근한 성모님의 품으로 안아주셨다. 그래서 그런지 성당 안에 계신 장미 십자가와 장미 성모님의 향기를 느끼며 가족을 위한 기도를 드렸다. 한여름 열대야가 푹푹 찌는 더위에 성지를 찾은 가족이 드리는 기도라 그런지 눈물이 왈칵 나왔다.


   낙동강변 언덕 위에 위치하고 있는 명례성지는 밀양과 김해를 잇는 나루가 있던 곳으로 일찍이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모여든 곳이다. 이곳은 네 가지 역사적, 문화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첫째, 복자 신석복 마르코(1828-1866년)가 출생한 곳이다. 둘째, 영남 지방의 네 번째 본당이자 마산교구에서는 첫 번째로 본당이 설립된 곳이다. 셋째, 명례본당의 초대 본당 신부이자 세 번째 방인 사제이며 한국에서 서품된(1896년) 첫 사제인 강성삼 신부의 사목지이며 돌아가신 곳이다. 넷째, 2011년 경남도 문화재자료 제 526호로 지정된 성전 건물의 역사적 의미이다.


   1938년 첫 성전을 축소 복원한 내부는 남녀의 자리가 구분되어 있었다. 벽을 향한 제대 및 그 위에 모신 십자가와 장미의 성모님은 초기 신자들의 신앙과 영성을 느낄 수 있게 한다.


   신석복의 생가는 그동안 교회의 무관심 속에 축사로 변하였으나, 2008년 그의 생가 터가 발견되면서, 명례성지 조성 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2010년 12월 생가터를 매입하였다. 현재 신석복의 생가 터에 순교자 기념 성당 건립을 계획 중이다.


   문화재로 지정될 만큼 아름답고 역사가 깊은 성지에서의 잠깐의 휴식을 취한 우리 가족은 김해시 진례면에 있는 복자 박대식 빅토리노 묘소를 찾았다.


   박대식 묘소를 찾아가기가 너무 힘들었다. 핸드폰과 자동차의 네비게이션을 다 동원해도 결국 계속 그 자리만 맴돌다, 결국 관할 진례성당에 전화해서 알아낸 문자로 찾아간 묘소는 을씨년스러웠다.


   지금은 폐쇄된 굴다리 위의 트럭들이 정지된 곳에서 이정표가 난 곳으로 순교자 묘지를 찾은 우리 가족은 해거름이 내려앉은 시간이 되어 무서웠다.


   바오로는 “여기서 살인사건이 나도 아무도 모르겠다.”면서, 순교자 묘지 관리가 너무 소홀하다고 말했다. 나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묘지에서 잠깐 묵념하는 걸로 순교자의 영성을 느꼈다.


   복자 박대식 빅토리노는 1811년 김해시 진례면 시예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정은 부유했으며 언제부터 신앙을 가지게 되었는지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부친 박민혁과 형제들은(대봉, 배홍, 대식)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다 병인박해를 만나 가족 모두가 피신하여 잡히지 않았으나, 1868년 무진박해 때 박대식은 조카인 박수연과 함께 붙잡힌다. 박대식은 경상 감영에서 연일 배교를 강요당하며 혹독한 고문을 받았고 1868년 8월 27일(음) 조카 박수연과 함께 참수 치명한다. 당시 박수연은 예비 신자 신분이었다.


   다음은 복자 신석복 묘소를 찾았다. 복자 신석복 마르코는 밀양시 하남읍 명례리에서 살았다. 명례지방은 일찍이 피난 교우들이 모여 살았던 곳으로 신석복과 그의 가족들은 이들의 권면으로 신자가 된 듯하다. 그의 형제들은 신석복이 순교할 때는 신자가 아니었고 훗날 모두 입교하였다.


   신석복은 소금과 누룩 장수였으며,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대구에서 내려온 포졸들에게 붙잡혔다. 그의 형제들이 포졸들을 포섭하려고 돈을 싸들고 오자 “나를 위해 포졸들에게 한 푼도 주지마라.”며 돌려보냈다고 한다. 순교 직전에는 “풀어준다 해도 다시 천주교를 봉행할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병인 치명사적’에 따르면 포졸들은 신석복이 신자인 것을 알고 동네로 잡으러 왔었다. 신석복은 길에서 체포되어 대구로 압송되었고 혹독한 심문을 받으며 배교를 강요당했지만 끝까지 신앙을 지켰다. 신석복은 1866년 2월 15일(음) 교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그의 나이는 39세 때였다.


    “주님, 유난히 더운 날에 순교자들의 영성을 조금이라도 더 느끼고자 이렇게 가족이 성지를 찾았으니, 당신 품에서 평화로운 안식을 누리고 있는 순교자들의 영성을 본받아 저희 가족들도 주님을 향한 영적 여정의 순례자가 되게 하소서.”


박명영 가타리나 명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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