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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구소식

교구아들 바오로와 함께 하는 한국 천주교 성지순례 10

작성자 : 홍보전산실 작성일 : 2016-10-13 조회수 : 1230

   8월 2일. 거제도에서의 가족 휴가를 마치고 돌아오는 날, 거제도에 있는 ‘복자 윤봉문 요셉 성지’를 방문하고 안산으로 출발하기로 하였다.


   아침 일찍 찾은 성지는 조용하고 평화로워 보였다.

   방명록을 쓰면서 거제도까지 성지순례를 다녀간 사람들이 많음을 보고는, 우리 가족뿐만 아니라 많은 분들이 휴가 때도 이렇게 많이 성지를 찾는구나하고 느끼니 괜히 내가 기분이 더 좋아졌다.
   지세포성지 사무국에서는 성지를 방문한 사람들에게 ‘거제도 해금강 관람 배’ 할인 혜택도 주고 있어서 좋았다.


   복자 윤봉문 요셉의 가족이 거제도에 정착한 것은 1868년경이다.
   병인박해 중에 윤사우 스타니슬라오가 양산 ‘대처’를 거쳐 이곳 진목성에 와 전교 활동을 폄으로써 활발하게 포교 활동이 이루어진다.
   윤봉문은 윤사우의 둘째 아들로 거제의 사도로서 형 경문과 함께 교회 회장직을 맡아 신자들을 모아 교리를 가르치고 전교에 힘쓰는 한편 자신이 수계에도 열심이었다. 1888년 2월 7일(음) 옥포에서 체포된 윤봉문은 거제 부사 박병용의 호출을 받고 거제 관아로 끌려가 태형을 받고 투옥되었다. 포졸들은 배교시키려고 심한 문초와 고문을 가했지만 순교자는 믿음으로 견디다 진주로 옮겨져 교살당해 순교하였다. 당시 나이 37세였다.
   순교자의 가족으로는 부인 진 펠리치타스와 아들 학송 루카(당시 7세), 딸 송악 가타리나(당시 2세)가 있었다.
   순교자의 유해는 진주 장재리 공소의 교우들이 거두어 공소 뒷산에 가매장하였다. 그 후 10년 뒤인 1898년경 당시 옥포 본당 복사로 있던 성 바오로가 순교자의 유해를 거제도로 모셔왔고 옥포 족발골에 안장하였다가 2013년 4월 20일 현재의 자리로 이장하였다.


   가족이 함께 찾은 거제도 성지에서 시원한 바닷바람과 함께 묻어온 성지의 향내는 가슴을 설레게 하였으며, 바닷바람만큼이나 순교의 모진 박해를 받으며 신앙을 지켜나간 순교자들을 생각하니 가슴이 뭉클해졌다.


   또한 거제도는 ‘천주교 순례길’이 조성되어 있다. “바람 속에 피어난 신앙의 꽃 110여년의 역사를 간직한 묵상의 시간으로 안내되는 순례코스는 ‘서이말 등대 지리끝(쥐이끝)’이 있다.
   거제도 동쪽 끝자락 주을리 지리끝이라고 불리는 곳이며, 거제도에 천주교 복음을 처음 가져온 윤사우와 그의 장남 경문(베드로)이 움막을 짓고 살던 외딴 곳이었다.


   1866년 병인박해를 피해 일본으로 가려고 이곳에 온 이들은, 일본을 포기하고 이곳에 자리를 잡아 낮에는 숨어있고 밤에는 해초를 캐어 생활하다보니 이상한 소문이 돌게 되었다. 그러다가 봉수대에 살던 한정선을 만나 함께 해초작업을 하며 경문과 친하게 되었는데, 한정선이 그들이 천주교인임을 알게 되었고 자기도 세례받기를 원하므로 윤사우(스타니슬라오)가 직접 교리서를 만들어 한정선이 세례를 받게 되었다. 이후, 경문은 공고지에 사는 주관옥의 딸 또금(아델라)과 혼인을 하고 아버지 사우는 함안 논실(가등)로 가고 경문은 이곳과 처가를 오가며 결국 처가살이를 하게 되었다.

   이곳을 보면 초기 박해를 피해 살던 천주교 신자들의 삶이 얼마나 척박했는지 알 수 있다. 세월이 지나 그들이 사용했던 움막과 밭은 흔적만 남아 있고 우물은 지금까지 잘 나오고 있다.

   또한 순례코스로 ‘공곶이’이란 곳이 있다. 거제도 일운면 예구마을 포구에서 산비탈을 따라 20여분 동쪽 끝자락에 위치한 공곶이는 한 노부부가 평생을 피땀 흘려 오직 호미와 삽, 곡괭이로만 일궈낸 자연경관지다.

   동백나무, 종려나무, 수선화, 조팝나무 팔손이 등 나무와 꽃만 해도 50여종 4만평이 넘는 농원 곳곳에 노부부의 손길 안 닿은 곳이 없을 정도로 공곶이는 생명의 숲 그 자체다. 또 한 코스는 ‘돌고래 전망대’ 가매 너른(가마 넓은)바위란 곳이다.


   둘째 봉문이 진목정에 있는 진진부의 여식 순악(아녜스)과 혼인하여 처가살이를 하게 되자 큰 아들 경문을 데리고 대마도가 보이는 주을리 끝자락에 있는 지리끝(쥐이끝- 서이말)에 자리를 잡아 움막을 지어 낮에는 숨어있고 밤에는 해초를 캐어 생활하다가 공고지에 사는 주관옥의 딸 또금(아델라)과 혼인하여 서이말과 공곶이를 왕래하며 살았는데 어느날 포졸들이 들어닥쳐  막무가내로 천주교인인 경문을 잡아가서 문초하고 태형을 가했다.

   풀려난 경문이 이 사실을 서울에 계신 주교님께 보고하러간 사이에, 출산을 위해 와현리에 있던 경문의 처 아델라와 동서 이석원을 관아에서 잡아가 남편의 행방을 대라며 문초하다 만삭인 그를 풀어주고 이석원을 심하게 문초하여 배교를 강요하나 이석원은 끝까지 버티다 거의 반 주검이 되어 풀려났다. 지금 이 자리(너른)에서 숨어버린 가족들도 찾을 수 없어서 한숨을 쉬다가 부싯돌로 담뱃불을 붙여 담배를 피우니 그 불빛과 냄새를 맡은 가족들이 모이게 되었다. 그리하여 가족들(이석원 내외, 주아델라, 동생 가족)은 여기서 살 수 없으니 욕지로 피신하기로 하고 출발하였다. 그러나 풍랑이 심하고 출산 때문에 외도에서 내려 아델라는 남의 집 부엌에서 출산하여 아들 낳는데 이름을 명주(명을 구하다)라고 지었다. 얼마 있다가 다시 이곳으로 되돌아오게 되었는데 이곳이 초기 거제도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피난했던 장소 중 하나이다.


   “주님, 유난히 더운 날에 순교자들의 영성을 조금이라도 더 느끼고자 이렇게 가족이 성지를 찾았으니, 당신 품에서 평화로운 안식을 누리고 있는 순교자들의 영성을 본받아 저희 가족들도 주님을 향한 영적 여정의 순례자가 되게 하소서.”


박명영 가타리나 명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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