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들고 외로울 때는 생활성가 ‘사명’을 듣고 힘을 얻는다는 진득구(바오로‧군포 본당) 씨는 척추장애 1급을 가지고 있다.
휠체어를 타고 다니기 때문에 미사 시간에는 맨 뒤에 자리를 하지만 본당의 모든 행사와 주일 본당 점심 나눔 봉사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그는, 성모님의 이끄심으로 오늘 여기에 있다고 말한다.
진득구 씨는 중소기업에 다니던 1986년 4월 어느 날 점심시간에 운동을 하다가 지붕에서 떨어졌다. 그 사고로 척추를 다친 그는 하반신 마비로 척추장애 1급 장애인이 되었다고 한다.
‘근무 시간이 아니고 점심 시간에 사고를 당했다.’는 이유로 회사로부터 아무런 보상을 받지 못한 채, 두 달 만에 병원에서 돌아온 그는 꼼짝도 못하고 누워 있게 되었다.
2남 4녀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난 진득구 씨를 바라보는 부모님은 한숨과 고통의 날을 보내게 되었다. 도시에서는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더러 보이기도 하지만, 시골에서 장애를 가지고 산다는 것은 죽기보다 힘들다고 한다. 도시에서도 그렇지만 특히 시골 일이라는 것이 손발이 움직여서 일을 하며 살아가는 것이라 더욱 힘들었고, 장애를 가진 자식을 두고 있다는 것은 시골부모님으로서는 너무나 고통스러운 일이었다고 한다.
그러기를 2년이 지난 1988년 어느 날, KBS방송국 ‘내일은 푸른 하늘’이라는 프로그램을 듣던 중에 장애인 직업알선에 관한 내용을 듣고 편지를 써서 올라가게 된 곳이 서울남부장애인 복지관이었다. 서울로 올라간다는 말에 부모님은 ‘가서 잘살라.’며 35만 원을 마련해 주었다.
하지만, 복지관에서 1주일 동안 교육을 수료한 후에는 각자 자기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토요일에 퇴소식을 한 그는 갈 곳이 없었다. 부모님께는 서울에 가서 살아보겠다고 하고 나왔기 때문에 고향으로 갈 수도 없었다.
여러 가지 생각을 ‘낙성대’에서 하고 있던 중 과천서울대공원 팻말이 보였다. 진득구 씨는 ‘그래도 죽기 전에 대공원이나 한번 가 보고 죽자.’ 생각하고 휠체어를 타고 낙성대에서 과천서울대공원까지 왔다. 그후, 그 곳에서 노숙하던 그를 환경미화원이 불법이기는 하지만 과천서울대공원 종합안내소 뒤편 청소 도구들을 넣어 놓은 곳에서 쉴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리고, 그 후에는 수중에 돈이 다 떨어진 그가 ‘노점’을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 사람도 나타났다. 그렇게 그는 여러 사람의 도움으로 ‘기념품’을 맡아 팔게 되면서 과천에 정착을 하게 되었다.
1992년도에 과천 본당에서 세례를 받은 진득구 씨가 군포로 온 것은 지금으로부터 13년 전이다. 20여 년 동안 기념품을 판 후 지금은 1년에 봄‧가을 4개월 정도 ‘쥐포와 오징어’등을 팔고 있다.
진득구 씨의 아파트 베란다에는 화초들이 많았다. 그는 아침에 눈을 뜨면 생명의 소중함을 알고 서로 공감하며 화초들과 인사를 나눈다고 한다.
하느님을 알기 때문에 기쁘고 웃으면서 살아간다는 그는 가끔 힘들 때 생활성가 ‘사명’을 들으며 마음을 달래곤 한다고 한다.
남들이 자신을 볼 때 ‘장애인으로 살아 힘들겠다.’고 생각할지는 모르지만, ‘서울대공원근처 비닐하우스 생활을 10년 정도 하던 중에 화장실이 없어서 대변을 받아 대공원까지 가져가서 버려야 하는 상황에서도 힘들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며, 오직 성모님의 이끄심으로 오늘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하는 진득구 씨.
지금은 레지오 단원이 되어서 정말 기쁘다고 말하는 진득구 씨는 일주일에 5일 정도 탁구, 베드민턴 등으로 체력을 단련한다.
‘어떤 일에서든지 뒤로 쳐지지 않고 항상 앞에 나선다.’는 그는 ‘앞에 나서는 이유는 나 같은 사람도 이렇게 살고 있으니 장애인이든 비장애인이든 용기와 희망을 가졌으면 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지금까지 고맙고 감사한분들은 서울대공원에서 처음 잠자리를 마련해 주신 분과 장사를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신 분, 또 기념품을 팔수 있도록 해 준 과장님, 비닐하우스에서 살 수 있도록 해 주신 자매님, 대부님이고, 현재 군포 본당 주임 이용화(프란치스코) 신부님께도 감사한다고 말했다.
이용화 신부는 자신이 욕창으로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찾아주셨고, 본당 리모델링할 때도 ‘장애인 화장실을 실제 체험해보라.’며 여러 가지로 신경을 써 주고 공사를 해 주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심지어 사고 나서 보상을 받지 못해 삶이 더 절절하게 다가왔고, 그로 인해 오늘 이 자리에 있게 됐다. 감사하다.’고 말하는 진득구 씨를 보며, ‘이 모두가 성모님의 이끄심’이라는 그의 말이 가슴 깊이 다가왔다.
임효례 다리아 명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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