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일(1812~1867)은 충청도 홍주의 교우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그 후, 경상도 문경새재 여우목으로 이사 갔습니다. 이윤일은 그곳에서 농사를 지었으며 결혼해 살았습니다. 그는 키가 크고 풍채가 당당해 위엄이 있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그의 바른 성품과 따뜻한 마음 그리고 열심한 신앙을 보고 따랐습니다. 그는 공소 회장으로 30년 동안 봉사했습니다.
병인박해가 경상도 지역까지 확대되었습니다. 1866년 11월 18일이었습니다. 집에 있던 이윤일은 포졸들이 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포졸들이 천주교 신자들을 체포하러 온 것임을 직감했습니다. 포졸이 물었습니다. “이 마을의 우두머리는 누구냐?” 이윤일이 대답했습니다. “나요!” 포졸이 다시 물었습니다. “너도 사교(邪敎)를 믿느냐?” 이윤일이 말했습니다. “내가 믿는 것은 사교가 아니라 성교(聖敎)요!” 포졸은 이윤일의 손목을 묶었습니다. 이윤일이 “도망가지 않을테니 끈을 풀어주시오!”라고 말하자 포졸은 끈을 느슨하게 해주었습니다.
이윤일을 비롯해 그의 가족과 교우 30여 명이 체포되어 문경으로 끌려갔습니다. 문경 관아에서 사흘 동안 신문과 고문에 시달린 후에 다시 상주로 이송되었습니다. 이윤일의 목에 무거운 칼이 씌워지고 쇠사슬의 족쇄가 채워졌습니다. 상주 목사가 직접 신문해 잡아 온 사람들을 세 부류로 나누었습니다. 첫 번째 부류는 배교자들과 아녀자들로 이들은 모두 집으로 돌려보냈습니다. 두 번째 부류는 배교하지 않겠다고 한 사람들로 교수형에 처했습니다. 세 번째 부류는 이윤일과 김씨 형제(김예기, 김인기)였는데 이들은 사교의 우두머리로 지목되어 대구 감영으로 압송되었습니다. 이윤일은 무거운 칼을 쓰고 있는데도 늘 평온하고 침착했습니다. 안타깝게도 이윤일의 부인과 두 살 된 어린 손녀는 감옥에서 죽었습니다. 남은 이들에게 사형선고가 떨어졌습니다. 이윤일은 사형선고 소식을 듣고 기뻐했습니다. 그는 자식들에게 마지막 말을 남겼습니다. “나는 이제 순교하러 간다. 너희들은 성실하게 하느님의 계명을 지켜라. 그리고 후에 꼭 나를 따라오너라.”
대구 감영으로 온 지 사흘 만에 대구 남문 밖 관덕정으로 끌려갔습니다. 사형수들에게 음식이 제공되었습니다. 두 김씨 형제는 사형이 무서워 눈물을 흘리며 음식을 먹지 못했습니다. 이윤일은 두 사람에게 용기를 내라고 격려했습니다. 그러곤 음식을 먹었습니다. 형장에서 집행관이 ‘사교 죄인’이라 적힌 선고문을 낭독했습니다. 이윤일은 주머니에서 엽전 스물다섯 닢을 꺼내 망나니에게 주며 말했습니다. “이 돈은 나를 위해 수고하는 자네에게 주는 것이니 받아서 쓰게. 그 대신 단번에 내 목을 베어주게.” 그러고는 직접 나무토막을 가져다 목에 받혔습니다. 망나니는 단번에 이윤일 성인의 목을 베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