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주간이 되면 교회는 십자가를 자줏빛 천으로 덮는데, 이는 단순한 관습이 아닌, 깊은 전례적 의미를 지닌 거룩한 행위입니다. 입으로 음식을 절제하는 단식이 있듯, 교회는 성상을 가림으로써 신자들이 눈으로도 단식하게 합니다. 이는 수난을 앞두고 몸을 숨기시고(요한 8,59) 십자가 위에서 신성마저 철저히 가리신 채 돌아가신 주님의 감추심에 우리가 동참하는 것입니다.
가려진 성상은 무엇보다 주님의 멀어지심을 전례 안에서 고백합니다. 성목요일 밤 체포되어 지하감옥에 갇히신 주님은 더는 우리가 만날 수도 볼 수도 없습니다. 자줏빛 천은 바로 그 부재와 멀어짐을 눈앞에 세워놓으며 동시에 죄로 인해 하느님의 영광을 바라볼 수 없게 된 인간의 처지를 침묵으로 고백합니다.
그러나 이 가려짐은 끝이 아닙니다. 성상을 가리는 것은 주님께서 영원히 우리 곁을 떠나신 것이 아니라, 그 멀어짐의 아픔을 온몸으로 살아냄으로써 부활의 만남이 얼마나 찬란한 기쁨인지를 더욱 깊이 깨닫게 하려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기에 더욱 간절히 찾게 되는 이 신비 안에서, 우리는 비로소 눈이 아닌 마음으로 주님을 바라보는 법을 배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