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4주간 화요일
우리 성당 아이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종종 아이들이 편지를 건네줍니다. 맞춤법도 엉망이고 글씨도 삐뚤삐뚤입니다. 내용도 별것 없습니다. 그러나 이 편지를 보면 저절로 아빠 미소가 생깁니다. 또 제게 다가와서 크고 작은 일을 일러바치듯 이야기하는 아이도 많습니다. 그만큼 저를 ‘믿어주고 사랑해 주는구나!’ 싶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아이들이 더 예쁘고 사랑스럽습니다.
어른들이 종종 이야기합니다. 아이들이 미사 때 너무 떠들지 않냐고, 너무 버릇없지 않냐고 묻습니다. 그런 생각이 전혀 들지 않습니다. 아이답게 열심히 미사에 집중하고 있다고 생각되고, 아이들 수준에 맞게 예의 바르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실수해야 아이다운 것 같고, 그 실수를 보면 괜히 미소가 나오게 됩니다.
사랑받고 있다는 것, 그것도 순수하고 맑은 아이들에게 사랑받고 있음이 커다란 기쁨이 됩니다. 그런데 그 사랑은 나를 낮춰야만 사랑받을 수 있었습니다. 아이들의 부모보다 훨씬 나이가 많다고 옛날 약장수들이 말하곤 했던 “애들은 가라.”라면서 거리를 뒀다면 절대로 사랑받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결국 사랑은 주고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먼저 사랑을 전해야 나 역시 사랑받을 확률이 올라갑니다. 특히 이 사랑은 전염성이 강하기에 자기가 받은 사랑을 남에게 전달했을 때 그 파급효과는 적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치유 활동을 복음에서 자주 목격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마귀 들려 말 못 하는 사람을 고쳐주십니다. 복음에서 말 못 한다는 것은 의학적인 문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 업의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악의 세력을 쫓아내는 크신 권능을 지니신 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행동을 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기 때문입니다(마태 9,36 참조). 이 표현을 희랍어 원문에서 ‘σπλαγχνίζομαι(스플랑크니조마이)’를 쓰는데, 이는 내장이 끊어질 듯한 극진한 자비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당신의 사랑으로 악의 세력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사람들을 모두 고쳐주신 것입니다.
악의 세력을 쫓아내는 경우를 본 적 없는 군중은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바리사이들은 “저 사람은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마태 9,34)라고 말하면서 비난합니다. 누구는 깜짝 놀라지만, 똑같은 결과를 보고서 비난합니다. 군중은 구원 활동을 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본 것이고, 바리사이는 질투로 왜곡하는 것입니다. 군중은 예수님의 사랑을 받아들였고, 바리사이는 그 사랑을 거부했습니다.
우리는 일상 안에서 계속 주어지는 주님의 사랑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요? 혹시 불평불만으로 그 사랑을 왜곡하고 거부하는 것이 아닐까요? 이런 사랑 없는 삶은 결국 행복하지 못한 삶을 만들게 됩니다.
오늘의 명언: 인생은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채워지는 것이다. 우리는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진 무엇으로 채워가는 것이다(존 러스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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