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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9월 28일 _ 조욱현 토마스 신부

작성자 : 홍보국 작성일 : 2025-09-28 조회수 : 35

복음: 루카 16,19-31: 부자와 라자로. 

 

오늘 복음은 지난 주일(루카 16,1-13)에서 이어지는 재물에 관한 가르침을 더욱더 구체적이고 극적으로 보여준다. 예수님께서는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를 통해 재물이 잘못 사용될 때 어떻게 인간의 마음을 메마르게 하고, 하느님 앞에서 얼마나 심각한 파멸로 이어지는지를 가르쳐 주신다. 

 

1. 부자와 라자로의 대조

부자는 “고운 옷과 값비싼 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며 살았다.”(루카 16,19)고 한다. 반면 라자로는 “몸은 헌데투성이에다 부자의 집 대문 앞에 버려진 채”(루카 16,20) 개들이 상처를 핥을 정도로 극심한 가난과 질병 속에 있었다. 두 인물은 이 세상에서 극적인 대조를 보인다. 그러나 죽음 이후에는 처지가 완전히 뒤바뀌어, 라자로는 아브라함의 품에서 위로를 받고, 부자는 불구덩이 속에서 고통을 겪는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 비유를 해석하며 이렇게 말했다: “부자가 죄를 지은 것은 단순히 부유했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 집 문 앞의 가난한 이를 무시했기 때문이다. 그는 사치 속에서 살면서도 라자로의 상처를 보지 못했다. 바로 그 무관심이 그의 파멸이었다.”(In Lazarum Concio, Homilia II, PG 48, 992) 즉, 죄는 부 자체에 있지 않고, 가난한 이를 향한 무관심과 사랑의 부재에 있다. 

 

2. 하느님의 정의와 삶의 재균형

아브라함은 부자에게 이렇게 답한다: “얘야, 너는 살아 있는 동안에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루카 16,25) 이 말씀은 하느님의 정의가 결국 모든 불의와 불공평을 바로잡으신다는 것을 보여준다. 세상에서 무시당한 이의 이름을 예수님께서 굳이 ‘라자로’(하느님이 도우신다)라고 부르신 것도 상징적이다. 사회와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지만, 하느님은 그를 잊지 않으셨다.성 아우구스티노는 이 장면을 해석하며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 “부자가 가진 부는 그에게 도움이 되지 못했고, 라자로가 겪은 가난은 그를 해치지 못했다. 오히려 부자의 교만은 그를 파멸시켰고, 라자로의 인내는 그를 구원으로 이끌었다.”(Sermo 299) 

 

3. 말씀을 듣는 귀

부자는 지옥에서 고통 중에 라자로를 보내 자기 형제들에게 경고해 달라고 간청하지만, 아브라함은 이렇게 답한다. “그들에게는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들어야 한다.”(루카 16,29) 구원은 기적적 표징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하느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것에서 온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하느님의 계시 헌장은 이렇게 선언한다: “성경은 하느님의 말씀을 담고 있으며, 성령의 감도로 기록된 것이므로, 교회의 끊임없는 생명과 양식이다.”(계시 21) 오늘날 우리에게는 단순히 모세와 예언자들뿐 아니라, 그리스도 자신의 말씀과 교회의 가르침이 주어져 있다. 그 말씀을 듣고 삶으로 실천하는 것이 구원의 길이다. 

 

4. 우리에게 주는 교훈

이사야 예언자는 말한다: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는 것”(이사 58,7). 부자는 바로 이 말씀에 귀를 닫았다. 그는 자신이 가진 재물과 자기 자신을 동일시하며, 더 이상 타인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을 잃어버렸다. 우리는 이 비유를 통해 재물이 단순히 중립적 수단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재물을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구원의 길과 파멸의 길을 가른다.

교황 프란치스코도 회칙 “찬미 받으소서!”(Laudato Si’)에서 이렇게 말했다: “가난한 이들과 지구는 부당한 개발과 이기적 소비의 피해자이다. 참된 회개는 그들과의 연대 안에서 드러나야 한다.”(49항) 

 

맺음말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한다. 구원은 먼 미래의 문제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다. 재물은 형제를 위한 다리가 될 수도 있고, 자신을 스스로 가두는 벽이 될 수도 있다.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이는 생명을 얻고, 말씀을 외면하는 이는 자기 욕망 속에 갇혀 파멸을 맞이한다. 라자로라는 이름처럼, 우리의 희망은 언제나 “하느님이 도우신다.”(El’azàr)라는 믿음 안에 있다. 이제 우리도 가진 것을 나누고, 가난한 이들을 기억하며,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 그럴 때 하느님께서 우리를 아브라함의 품, 곧 영원한 잔치로 불러 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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