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루카 11,37-41: 겉은 깨끗이 닦아도 속에는 착취와 사악이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이 전통적 정결례에 집착하면서도 마음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 차 있음을 지적하신다. 이는 외적 종교 행위와 내적 회개 사이의 불일치를 드러내는 말씀이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잔과 접시의 겉을 닦으면서 속을 더럽힌다면, 그것은 사람을 기쁘게 하는 외식일 뿐 하느님께 드리는 경배가 아니다.”(Hom. in Matth. 72)라고 말한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속’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인간의 중심인 마음(καρδία, 카르디아)이다. 성경에서 마음은 하느님께서 사시는 자리이자, 사람이 진정 누구인지 드러나는 곳이다(마태 5,8 참조).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에게 “안에 있는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해질 것이다.”(41절) 말씀하신다. 성 암브로시오는 “자선은 외적 정결례보다 훨씬 강력한 정화의 힘을 가진다. 왜냐하면 자선은 마음을 정화하고, 그 마음에서 다시 모든 행위가 흘러나오기 때문이다.”라고 강조했.다(Expositio in Lucam VII, 115). 교회는 전통적으로 자선을 영혼의 씻음으로 이해해 왔다. 토비트서와 집회서가 말하듯이, 자선은 단순한 돈이나 물질의 나눔을 넘어, 사람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은총의 길이다.
성 가이사리우스는 “자선을 단지 가난한 자에게 빵을 나누어 주는 것으로만 생각하지 마라. 형제를 용서하는 것도 자선이고, 죄인을 훈계하는 것도 자선이며, 기도 중에 다른 이를 기억하는 것도 자선이다.”라고 가르쳤다(Sermo 25, 4). 성 아우구스티노는 “사랑이 없으면 아무리 큰 선행도 무익하다. 그러나 사랑이 있으면 작은 행위도 위대하다.”(Sermo 34) 말한다. 즉, 자선은 사랑의 구체적 표현이다.
교리서는 “자선은 영적 자선과 육적 자선으로 구분된다. 굶주린 이에게 먹을 것을 주고, 헐벗은 이에게 옷을 입히고, 죽은 이를 묻는 것은 육적 자선이다. 무지한 이에게 가르치고, 의심하는 이에게 조언하며, 슬퍼하는 이들을 위로하고, 죄를 용서하고, 불의를 참아내며, 적을 사랑하는 것은 영적 자선이다.”(2447항) 교회는 전통적으로 이 자선 행위를 가르치며, 이것이 신자의 삶을 정화하고 성화로 이끈다고 강조한다.
오늘 복음은 신앙인의 삶이 단순한 형식이나 외적 의무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내적 정화와 사랑의 행위로 드러나야 함을 일깨워 준다. 나는 겉으로는 신앙인의 모습을 하고 있으면서도, 내 마음속에는 탐욕과 자기중심성이 자리 잡고 있지 않은가? 나는 ‘자선’을 단지 물질적 나눔으로만 한정시키지 않고, 용서, 위로, 훈계, 기도와 같은 영적 자선으로 확장하고 있는가?
결론적으로, 가장 큰 정화의 힘은 자선(사랑)에 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자선을 통해서 우리는 참으로 깨끗하게 될 수 있는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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