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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10월 30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홍보국 작성일 : 2025-10-30 조회수 : 169

루카 13,31-35 

 

죽음의 위협 이기는 법: 새끼를 품은 암탉처럼 

 

 

오늘 복음에서, 몇몇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겁을 주기 위해 아주 현실적인 경고를 합니다.

"여기에서 떠나십시오.

헤로데가 선생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이것은 빈말이 아닙니다.

헤로데 안티파스, 그는 이미 세례자 요한의 목을 벤, 실제적인 권력이자 '죽음의 위협' 그 자체였습니다.

우리 삶에도 이런 '헤로데'가 있습니다.

나의 생사여탈권을 쥔 것처럼 보이는 직장 상사, 나의 미래를 위협하는 경제적 불안, 나의 생명을 위협하는 질병, 혹은 나를 비난하는 여론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 '헤로데'의 눈치를 보며, 그가 "너를 죽이려 한다"는 말 한마디에 두려워 떨며 발걸음을 멈춥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그분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가서, '저 여우'에게 이 말을 전하여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당대 최고의 권력자, 자신을 죽이려는 왕을 '여우'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이 당당함, 이 죽음을 초월한 자유는 도대체 어디에서 오는 것입니까?

예수님께서는 그 답을 바로 다음 말씀에서 우리에게 주십니다.

"암탉이 제 병아리들을 날개 아래 모으듯이, 내가 몇 번이나 너의 자녀들을 모으려고 하였더냐?" 

 

예수님의 관심은 '헤로데'라는 '여우'에게 있지 않았습니다.

그분의 관심은 오직 '병아리'들, 즉 당신의 자녀들에게 생명을 주는 '암탉'의 삶에 있었습니다. 

 

우리는 올해 2025년, 제1차 니케아 공의회 1,700주년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4세기 로마 제국은 '아리우스 이단'에게 삼켜졌습니다.

아리우스파는 "예수님은 하느님이 아니시라, 하느님께서 만드신 첫 번째 피조물일 뿐이다"라고 가르쳤습니다.

이것은 교회의 심장을 겨누는 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하느님이 아니시라면, 우리의 구원은 없기 때문입니다.

성인의 핵심 저서인 [말씀의 강생에 관하여]에서 말한 것처럼,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신 것은, 우리 인간이 하느님이 되게(신화, 神化) 하시려는 것"인데, 예수님 자신이 하느님이 아니시라면 이 '신적 생명'을 우리에게 주실 수 없습니다. 

 

그런데 콘스탄티우스 황제 자신이 이 아리우스파에 물들었습니다.

황제는 로마 제국의 모든 주교에게 "아리우스파를 받아들이라"고 명령했습니다.

황제가 교회의 '헤로데'가 된 것입니다.

제국의 모든 주교가 황제의 권력 앞에서 눈치를 보며 하나둘씩 타협하고 쓰러졌습니다. 

 

바로 그때, 알렉산드리아의 젊은 아타나시우스가 홀로 일어섭니다.

그는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 부제로서 참석하여, "예수님은 성부와 '동일 본질'(homoousios)이시다"라는 신앙 고백을 하였습니다.

황제는 그를 '여우'처럼 집요하게 물어뜯었습니다. 그는 네 명의 황제에 의해 무려 다섯 번이나 유배를 당했고, 17년이라는 세월을 광야와 망명지에서 보내야 했습니다. 

 

모두가 그에게 "세상이 모두 아리우스파가 되었는데, 왜 당신 혼자 맞서는가?"라고 비난했습니다.

그때 그는 교회사에 길이 남을 대답을 합니다.

"Athanasius contra mundum!" (아타나시우스가 세상 전체에 맞서겠다!)

그는 '암탉'처럼 진리라는 생명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놓았습니다.  

 

우리 현대사에서 가장 혹독한 '헤로데'를 만났던 한 가톨릭 신자, 고(故) 김대중 대통령도 있습니다.

그는 '민주주의'라는 '생명'을 국민들에게 주고자 싸웠습니다.

그 이유로 그는 당대 최고의 '헤로데'들에게 끊임없이 생명을 위협받았습니다.

그 절정은 1973년 도쿄 납치 사건이었습니다. 중앙정보부 요원들에게 납치당한 그는, 배(용금호)에 실려 캄캄한 밤바다로 끌려 나갔습니다.

그의 눈은 가려지고, 손발은 묶인 채 무거운 쇠붙이가 몸에 매달렸습니다.

그는 바다에 수장(水葬)될, 죽음의 마지막 순간을 맞이했습니다.

'여우'의 아가리 속이었습니다. 

그는 훗날 자서전에서, 그 마지막 순간을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하며,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며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바로 그때였습니다.

강렬하게 빛나는, 눈부시게 하얀 예수님의 모습이 제 눈앞에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저는 분명히 느꼈습니다.

'너는 살 것이다.'

그 순간, 저는 제가 살 것을 직감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환상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체험'한 바로 그 순간, 정체 모를 비행기가 배 위로 초저공 비행하며 붉은 조명탄을 터뜨렸고, 납치범들은 "들켰다"고 당황하며 그를 바다에 던지는 것을 포기했습니다. 

 

그는 '암탉'처럼 국민들에게 '자유'라는 생명을 주기 위해 기꺼이 죽음을 받아들이는 순간,

'아버지'께서 생명을 보장해 주심을 '체험'한 것입니다.

이 '체험' 이후, 그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1980년, 전두환이라는 또 다른 '헤로데'가 그에게 사형을 선고했을 때, 그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청주 교도소에서 "주님은 저를 결코 버리지 않으실 것입니다. ... 저는 제가 가는 이 길이 주님께서 가신 십자가의 길임을 믿으며, 하느님의 그 크신 사랑과 섭리를 굳게 믿습니다."라는 옥중서신을 썼습니다.

그는 이미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내 생명의 주인이 저 '독재자'라는 '여우'가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이심을 말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은 사람들은 모두 '자기 생명을 보존하는 것'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오직 '암탉'처럼 타인에게 '생명을 주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아타나시우스는 '진리의 생명'을, 김대중 대통령은 '자유의 생명'을 주려 했습니다.  

 

그리고 그 '생명을 주는 삶' 속에서, 그들은 '생명의 주인'이신 아버지를 '체험'했습니다.

이 '체험'이야말로 세상의 그 어떤 '헤로데'도 한낱 '여우'로 보이게 만드는 용기의 원천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두려워합니까?

죽음의 공포가 우리를 고통스럽게 합니까? 그렇다면 '생명을 주는 존재'가 되십시오.

내가 '암탉'이 되어, 오늘 내 가정에서, 내 직장에서, '용서의 생명', '친절의 생명', '진실의 생명'을 내어주기 시작할 때, 우리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내 힘이 아닌, '아버지'께서 주시는 힘으로 내가 살아가고 있음을 말입니다.

그리고 그 '체험'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여, 세상의 모든 '헤로데'를 향해 당당히 외치게 할 것입니다. 

 

"가서, '저 여우'에게 이 말을 전하여라.

내 생명은 네 손에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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