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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11월 9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홍보국 작성일 : 2025-11-09 조회수 : 132

성전과 평화와 나는 하나다 
 
 
성전과 평화와 나는 하나다 찬미 예수님 오늘은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입니다.
전 세계 모든 성당의 ‘어머니 성당’이자 ‘머리’가 되는, 최초의 성전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우리는 왜 이렇게 ‘하느님의 집’을 기념할까요?
사람은 자기가 사는 ‘집’에 의해 형성됩니다.
신학적으로 ‘집’이란, "지금 나에게 최고로 평화를 주는 것, 그래서 내가 가장 오래 머물고 싶은 곳"을 의미합니다.
그것이 어머니의 품일 수도 있고, 어떤 이에게는 술병일 수도 있고, 또 다른 이에게는 성전일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어디에 머무느냐에 따라 나의 정체성, 곧 ‘자존감’이 결정된다는 사실입니다. 
 
영화 ‘쇼생크 탈출’에 '브룩스'라는 노인이 나옵니다.
그는 50년이라는 세월을 쇼생크 교도소 안에서 보냈습니다.
50년 만에 '자유'를 얻어 가석방이 결정되자, 그는 기뻐하는 대신 공포에 질려 절규합니다.
칼을 들고 동료를 위협하며 발버둥 칩니다. 
 
"제발 나를 내보내지 말아 주시오!" 그에게 자유는 주어졌지만, 세상에 그가 마음 둘 '집'은 없었습니다.
그가 잠시 머물 숙소는 있었지만, 그의 영혼이 에너지를 회복하고 참된 평화를 얻을 '집'은 아니었습니다.
그의 진짜 '집'은, 역설적이게도, 50년 동안 살았던 '교도소'였습니다.
산속의 짐승들에게도 옹달샘이 필요하지만, 천적의 위협 없이 조용히 쉴 수 있는 그들만의 '굴'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브룩스는 나오기는 원했어도, 세상에 자신의 '굴', 즉 새로운 '집'을 마련하지 못한 것입니다.
결국 그는 차가운 여관방 벽에 "브룩스, 여기에 머물다 감(Brooks was here)"이라는 쓸쓸한 유서를 남기고, 교도소라는 '집'을 잃어버린 상실감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생을 마감합니다. 
 
정신과 의사였던 빅터 프랭클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라는 지옥의 '집'에 갇히게 됩니다.
그곳은 인간의 모든 자존감을 파괴하는 공간이었습니다.
살을 에는 추위 속에서 강제 노역을 하던 어느 날, 그는 육체적 고통보다 더한 절망감에 빠져들었습니다. 
 
그때, 그는 문득 '아내'를 떠올렸습니다.
함께 있지 못했지만, 그는 의식적으로 '아내'라는 '사랑의 집'에 머무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훗날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책에 이렇게 기록합니다.
"나는 그때 '사랑'이 인간이 추구할 수 있는 궁극적이고 가장 높은 목표임을 깨달았다. ...
한 인간이 모든 것을 빼앗긴 최악의 상황에서도,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을(그녀의 미소를, 그녀의 목소리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구원과 평화를 경험할 수 있다." 
 
빅터 프랭클에게 '집'은 아우슈비츠가 아니었습니다.
수용소는 세상이었습니다.
그에게 보이진 않았지만, 그에게 영원한 평화를 주는 존재, 그의 '아내'가 곧 그의 '집'이었습니다. 
 
그는 아내를 생각할 때마다, 이 거친 환경을 살아갈 수 있는 에너지를 얻었습니다.
다시 ‘쇼생크 탈출’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주인공 '레드' 역시 브룩스와 똑같이 수십 년을 감옥에서 보냈고, 똑같이 가석방되었습니다.
그 역시 브룩스처럼 혼란스러웠고, "브룩스, 여기에 머물다 감"이라고 쓰인 그 방에 머물게 됩니다.
그 또한 브룩스와 같은 비극적 결말을 맞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습니다.
레드에게는 그를 기다리는 '친구', 앤디가 있었습니다.
감옥에서 늘 대화하며 희망을 나누던 그 친구가 그의 '집'이 되어 주었습니다. 
 
브룩스에게는 돌아갈 교도소 외에 아무런 '집'이 없었지만, 레드에게는 '친구를 만나러 가야 한다'라는 새로운 '집'(목표이자 평화)이 있었습니다.
그는 결국 '친구'라는 집을 찾아 태평양의 작은 해변으로 떠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는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을 지내며 우리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지금 나에게 가장 큰 평화를 주는, 나의 진짜 '집'은 무엇인가?"
어떤 사람에게 집은 '통장 잔고'일 수 있습니다. 
 
잔고가 늘어날 때 평화를 얻습니다.
어떤 분은 '자녀'나 '아내'일 수 있고, 어떤 분은 '술'이나 '운동'일 수 있습니다.
그것들이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것이 나의 궁극적인 '집'이 될 때, 문제가 생깁니다. 
 
아이들의 집은 부모입니다.
다리 밑에서 살아도 부모만 있다면 집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집은 세상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해 줄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세상 것으로는 세상 것을 이길 수 없습니다.
죽음을 이길 수 없습니다.
오직 죽음을 이기신 그리스도를 집으로 삼는 자만이 세상을 이기는 힘을 지니게 됩니다. 
 
오늘 복음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장 위대한 집은 '하느님의 집'이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느님의 집 안에서조차 '돈'과 '명예'(상거래)를 그들의 더 큰 평화로 삼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집'이 오염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 '집'을 정화하셔야만 했습니다.
모든 집은 생존을 위협하는 공포로부터 탈출하여 쉬는 곳입니다.
그 집의 주인이 부활하신 분이시라면 그 집에 사는 이들은 죽음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아이들이 부모가 아래 있으면 무조건 부모가 받아줄 줄 알고 뛰어내리는 것과 같습니다. 
 
이와 관련된 깊은 울림을 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바로 1912년 타이타닉호의 침몰과 함께한 이시도르와 아이다 스트라우스 부부의 이야기입니다.
메이시스 백화점의 소유주였던 이시도르는 노인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남성들과 마찬가지로
구명보트 승선을 거절할 수 있는 용기가 있었습니다. 
 
그의 아내 아이다에게는 당연히 구명보트의 자리가 주어졌습니다.
그녀는 심지어 곁을 지키던 하녀 엘렌에게 자신의 비싼 모피 코트를 벗어주며 보트에 태워 보낼 만큼, '물질'이라는 집에 연연하지 않았습니다. 
 
선원들이 그녀를 재촉했지만, 아이다는 구명보트에 오르기를 단호히 거절하고, 남편 이시도르의 팔을 붙잡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집니다.
"우리는 긴 세월을 함께 살아왔어요. 당신이 가는 곳에, 나도 가겠어요." 
 
무엇이 그녀를 그렇게 만들었을까요?
아이다에게 '참 평화를 주는 집'은 구명보트가 아니라, 바로 그녀의 '남편'이었습니다.
남편은 하느님이라는 영원한 '집'에 머물렀기에, 이 세상 가장 큰 '집'(타이타닉)이 무너지는 순간에도, '생명'이라는 집착을 넘어서 타인에게 생명을 양도하면서도 죽음 앞에서 평화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누구나 자기 생존을 의탁하는 집이 있고 그 집과 같은 운명을 맞습니다.
하느님의 집에 살면 이시도르와 아이다처럼 죽임을 당할 것이고, 그리스도처럼 부활할 것입니다.
그러나 돈이나 세상 것에 의탁하면 그것들과 함께 사라져버릴 것입니다. 
 
사람의 행복은 이 자기 정체성에서 오는 자존감에 있습니다.
위대한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평생토록 세상의 쾌락과 명예라는 '집'을 전전하다가, 마침내 참된 '집'을 찾고 나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주님, 당신은 저희를 당신을 향하도록 창조하셨기에, 저희 마음은 당신 안에서 쉬기(머물기)까지 평화를 누리지 못하나이다." (고백록) '쉼', '머무름', '평화'. 이것이 바로 '집'의 본질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가장 먼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에게 평화를 빈다." (요한 20,19)
이 평화를 주시는 분, 우리가 영원히 머물러야 할 '집'이신 그분께서, 지금 바로 저 '감실'에서 우리를 애타게 기다리고 계십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삶이 힘든 데 왜 찾아오지 않습니까?
왜 그토록 지쳐 있으면서, 평화 그 자체이신 당신의 '집'에 머무르지 않습니까?
각자 자신의 본당(성전)을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성체조배'를 하십시오. 
 
성체조배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나의 '참 집'이신 주님 앞에 조용히 '머무는' 연습입니다.
그분의 평화를 내 마음 깊이 새기는 시간입니다.
그렇게 그 '집'을 내 안에 품고 사는 사람은, 성모 마리아께서 예수님을(하느님의 집을) 당신 안에 모시고 당당하게 엘리사벳에게 걸어가셨던 것처럼, 이 세상 누구도, 그 어떤 절망도 두려워하지 않고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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