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카 17,1-6
용서하려 하지 말고 다른 사람이 되어라
찬미 예수님!
우리가 '용서'라는 주제를 만날 때마다, 어쩌면 우리 마음속에는 절망이 먼저 찾아올지도 모릅니다.
'나는 절대로 저 사람을 용서할 수 없는데'라는 현실의 벽 때문입니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께서는, 바로 그런 '불가능한 용서'에 대한 당신의 가정사를 이렇게 나누어 주십니다.
한 신부님의 아버님은 평생을 알코올 중독으로 사셨다고 합니다.
술에 취하지 않으신 아버지를 기억하는 날이 거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렇다면 그 옆을 지키는 '아내'의 삶은 어떠했겠습니까?
아마도 우리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머니에게는 단 하나의 무기가 있었습니다.
바로 '기도'였습니다.
어머니는 그 절망의 세월 속에서도 매일같이 성전을 찾으셨고, 묵주를 손에서 놓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그날도 어머니는 성전에서 묵주기도를 바치고 계셨습니다.
'환희의 신비'였습니다.
1단, 2단, 3단을 지나, 4단 '예수님을 성전에 바치심'을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이 아기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함"
어머니는 이 신비를 깊이 묵상하고 있었습니다. 율법에 따라 정성껏 아기를 바치는 성모님의
마음을 따라가던 바로 그 순간, 기이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묵상 중에, 문득 남편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술에 취해, 자신을 그토록 괴롭히던 '남편'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그 남편의 모습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더 이상 자신을 고통스럽게 하는 '남편'이나 '웬수'가 아니었습니다.
어머니의 마음속에서 이런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저 사람은 네 남편이 아니다. 저 사람은… 하느님께서 나에게 맡기신, 나의 '큰아들'이다."
이것은 엄청난 인식의 전환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머니를 '다른 사람'으로 만드신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아내'는 '남편'을 원망할 수 있고, 지치면 이혼하고 떠나버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어떻습니까? '어머니'는 병든 '아들'을 버릴 수 없습니다.
낳아준 자식은 아니지만, 하느님께서 '영적으로' 맡기신 '큰아들'임을 깨닫는 순간, 어머니의 마음은 원망에서 '연민'으로 바뀌었습니다.
남편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여전히 술을 드셨습니다.
하지만 '어머니'가 변했습니다.
'상처받은 아내'가 '기도하는 어머니'로 변하자, 놀랍게도 그 가정이 평화를 되찾기 시작했습니다.
어머니가 평화로워졌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다른 사람'이 되어 용서에 이른 이야기는 또 있습니다.
11세기 이탈리아 피렌체는 '복수'가 법이자 명예였던 시대였습니다.
가문의 누군가가 살해당하면, 그 피를 갚는 것(Vendetta)은 아들의 신성한 의무였습니다. 귀족 기사였던 '요한 구알베르토' 역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형제가 정적에게 잔인하게 살해당하자, 그는 복수심에 불타올랐습니다.
몇 년 동안 그는 원수를 찾아 헤맸습니다.
마침내 1028년, '성 금요일' 아침이었습니다.
그는 피렌체 외곽의 좁은 길에서, 그토록 찾아 헤매던 원수와 마주쳤습니다.
도망칠 곳도, 숨을 곳도 없는 외길이었습니다.
요한은 승리에 찬 복수심으로 칼을 뽑아 들었습니다.
이제 저 자의 심장을 찌르면, 가문의 명예도, 자신의 분노도 모두 해결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무기도 없이 홀로 있던 원수는 말에서 내려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는 목숨을 구걸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두 팔을 벌려 '십자가' 모양을 만들었습니다.
바로 그날, 온 교회가 "보라, 십자가 나무"를 노래하며, 그리스도의 죽음을 묵상하던 바로 그
성 금요일에, 원수는 자신의 몸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형상화하며 그의 '믿음' 앞에 자신을 내어 맡긴 것입니다.
칼을 든 요한은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습니다. 그의 눈앞에 있는 것은 더 이상 원수가 아니었습니다.
그를 위해, 그리고 지금 이 원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는 '복수하는 자'에서 '십자가를 목격한 자'로,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차마, 십자가의 형상을 하고 있는 그를 찌를 수 없었습니다.
요한은 '용서해야지'라고 노력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형상 앞에서, '복수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는 칼을 칼집에 꽂고 말에서 내렸습니다.
그리고 무릎 꿇은 원수에게 다가가, 그를 껴안았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예수님께 바로 이 '불가능한' 명령을 듣습니다.
"그가 하루에 일곱 번 너에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돌아와 '회개하네' 하면, 너는 용서해 주어야 한다."(루카 17,4)
'일곱 번'이라는 것은 '무제한의 용서'를 뜻합니다. 이것은 인간적으로 불가능한 명령입니다.
나를 한 번 속인 사람은 용서할 수 있어도, 일곱 번이나 나를 배신하고 돌아와 "미안해, 회개할게"라고 말하는 사람을 어떻게 또 용서합니까? 그것은 정의가 아니며, 어리석은 일처럼 보입니다.
제자들도 이것이 자신들의 힘으로는 '불가능함'을 즉시 깨달았습니다.
그들은 '상처받은 나'로서는 '용서하는 자'가 될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께 이렇게 간청합니다.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루카 17,5)
놀라운 통찰입니다.
그들은 "예, 주님. 저희가 더 노력해서 용서해 보겠습니다"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주님, 그것은 저희 힘으로 안 됩니다. 그것을 '할 수 있게' 만드는 다른 힘, 즉 '믿음'을 주십시오"라고 요청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가지고 있다면, 이 뽕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루카 17,6)
예수님은 '큰 믿음'을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가장 작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면 된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그 '겨자씨'는 무엇입니까?
이 '겨자씨'는 바로 '그리스도' 자신이며, 우리에게 주어지는 '성체'입니다.
뽕나무는 뿌리가 깊고 질겨서 도저히 뽑히지 않는 나무입니다.
우리 마음속의 '용서할 수 없는 증오심'이 바로 이 뽕나무와 같습니다.
내 노력으로는 절대 그 뿌리를 뽑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성체'라는 이 작은 겨자씨가 내 안에 심기면, 즉 내가 그분을 받아 모시고 '그분 때문에 나도 할 수 있다'고 믿으면, 그 믿음이 불가능해 보이는 증오의 뽕나무를 뿌리째 뽑아 바다에 던져버리는 기적을 일으킵니다.
이 믿음은 11살의 작은 소녀에게서도 똑같이 증명됩니다.
성녀 마리아 고레티입니다.
그녀는 이웃 청년 알레산드로의 추행을 거부하다가 14번이나 칼에 찔려 죽어갔습니다.
병원에서 임종을 맞이하던 소녀에게 신부님이 물었습니다.
"마리아, 너를 찌른 알레산드로를 용서하느냐?" 우리는 이 질문이 얼마나 잔인한지 압니다.
"예"라고 대답하는 것이 얼마나 불가능한지 압니다.
하지만 이 11살 소녀는 무엇이라고 대답했습니까?
"네! 저도 그를 용서합니다.
그리고 저도 그가 천국에 오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마리아 고레티는 신학자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불과 몇 달 전, 생애 처음으로 '첫영성체'를 했습니다.
그녀는 '성체'라는 겨자씨를 가슴에 품고 있던 아이였습니다.
그녀는 이미 '용서하시는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녀는 '용서해야지'라고 노력한 것이 아닙니다. 그녀는 이미 '용서할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녀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알레산드로의 구원을 바라며 용서를 선포하신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를 용서하려고 노력해라"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대신 "네가 용서할 수 없음을 인정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나에게 와서 '겨자씨'를 받아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용서의 유일한 길입니다.
우리의 노력이 아니라, 우리 안에 오시는 성체를 '믿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으로, 증오의 뽕나무를 뽑아내고 그리스도의 평화를 심는 오늘이 되시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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