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주보

수원주보

Home

게시판 > 보기

오늘의 묵상

11월 18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홍보국 작성일 : 2025-11-18 조회수 : 72

루카 19,1-10 
 
당신은 올라갈 무화과나무가 있습니까? 
 
 
찬미 예수님!
오늘 복음의 자캐오는 '돌무화과나무'에 올랐습니다.
남들의 시선을 감수하고, 체면을 버리고,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보겠다'는 열망 하나로 나무에 올랐습니다.
마더 데레사 성녀에게도 이 '돌무화과나무'에 올라야 했던 결정적인 순간이 있었습니다. 
 
1946년, 36세의 아녜스 수녀(마더 데레사의 본명)는 이미 18년 차의 베테랑 로레토 수녀였습니다.
그녀는 캘커타 성 마리아 수녀원 부속 학교의 교장으로, 부유한 집안 소녀들에게 지리를 가르쳤습니다.
그녀의 삶은 안락하고, 존경받았으며, '성공한' 수도자의 삶(군중 속의 의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영혼은 이미 '싫증'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훗날 고백하기를, "안락한 수녀원 담장"과 "담장 밖 빈민가의 비참함" 사이의 거대한 괴리에 고통받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더 깊이 알고 싶었지만, 수녀원의 안전한 규칙과 일상
(자캐오를 막아선 '군중')이 그녀를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영적인 해답을 찾기 위해 필사적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녀가 1946년 9월 10일, 다르질링행 기차에 오른 이유입니다.
그녀가 그토록 피정을 갈망하며 기차를 탔던 그 '노력' 자체가, 이미 일상의 안락함(군중)을 벗어나
주님을 만나고자 했던 그녀의 첫 번째 '돌무화과나무'였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그 '열망의 나무' 위에 올라가 있을 때, 예수님께서 지나가셨습니다. 
 
기차가 캘커타의 빈민가를 덜컹거리며 지나칠 때, 그녀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영감이 아니라, 그녀의 증언에 따르면 명확한 '명령'이었습니다.
"나는 목마르다." (I Thirst.) 
 
그 순간, 그녀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비로소 '진짜로' 본 것입니다.
그분은 깨끗하고 안락한 수녀원(군중) 안에 계신 분이 아니라, 가장 더럽고 버림받은 빈민가에 목마른 채 누워 계셨습니다. 
 
하지만 진짜 '돌무화과나무'는 이제 시작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본' 것과, 그분께 '내려가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였습니다.
그녀 앞에는 자캐오보다 더 큰 장애물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군중', 즉 수녀원을 떠나는 것을 금지하는 엄격한 교회법과 전통이었습니다.
둘째는 '작은 키', 즉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한 명의 수녀라는 한계였습니다. 
 
그녀가 올라야 할 두 번째 '돌무화과나무'는, 바로 '교회법과 전통의 벽을 넘어서는 끈질긴 순명'이었습니다.
그녀는 2년 동안, 안락한 수녀원에 머물면서도 매일 교황청과 대주교에게 편지를 쓰며 '떠나게 해달라'고 청했습니다.
모두가 그녀를 "미쳤거나, 교만해졌다"고 꾸짖었습니다
(자캐오를 꾸짖던 군중처럼). 하지만 그녀는 "주님을 만나러 가야 한다"는 열망 하나로, 가장 고통스러운 '기다림'과 '인내'라는 나무 위에 머물렀습니다. 
 
마침내 1948년 8월, 교황 비오 12세의 허락이 떨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녀의 '돌무화과나무' 아래에서 이젠 그녀의 가슴 속에 들어오셨고, 그녀는 자신이 이전에 추구하던 것을 버렸던 것입니다.  
 
그녀는 로레토 수녀원의 검은 수도복을 벗었습니다.
그리고 캘커타의 거리에서 가장 가난한 인도 여인들이 입는 1달러짜리 값싼 '파란 줄무늬 사리'로 갈아입었습니다.
그녀의 손에는 단돈 '5루피'(당시 환율로 약 100원)가 들려 있었습니다.
그녀는 '나무'에서 내려와, 예수님이 기다리시는 '빈민가'(자캐오의 집)로 들어갔습니다.
그날, 구원이 캘커타에 임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자캐오를 만납니다.
그는 세관장, 즉 민족의 반역자요 공인된 죄인이었습니다.
그는 부자였지만, 그의 영혼은 지독히 가난했고 왜소했습니다.
성경은 그가 '키가 작았다'(루카 19,3)고 말합니다.
이는 단지 신체적인 조건만이 아니라, 군중(세상)의 비난에 짓눌려 하느님을 볼 수 없었던 그의 영적 상태를 상징합니다. 
 
그런 그에게 간절한 열망이 하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떠한 분이신지 보려고"(루카 19,3)
애썼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두 가지 거대한 장애물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군중'이었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죄인이라 손가락질하며 길을 막아섰습니다.
둘째는 '작은 키'라는 자신의 한계였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예수님을 만나고 싶지만, 세상의 시선과 비난(군중)이 두렵습니다.
"저 사람 너무 열심이야", "유난 떤다"는 말이 무섭습니다.
또한 "나는 배운 게 없어서", "성격이 소심해서", "죄가 너무 많아서"라는 내 안의 '작은 키' 때문에 주님을 볼 수 없다고 주저앉습니다. 
 
자캐오는 어떻게 했습니까?
그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군중을 탓하거나 자신의 키를 원망하며
주저앉지 않았습니다.
그는 "달려가서" "돌무화과나무 위로 올라갔습니다."(루카 19,4)
이것이 핵심입니다.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는 것. 이것은 상식적인 행동이 아닙니다.
체면을 구기는 일입니다.
어린아이들이나 하는 짓입니다.
예리코의 세관장이, 그 부자가, 체면도 버리고 옷이 찢어지는 것도 감수하며 나무 위에 올라간 것입니다. 
 
왜 그랬습니까?
"예수님을 꼭 보고 싶어서"입니다.
이 나무는, 예수님을 만나고 싶은 간절한 열망
때문에, 남들의 시선(군중)과 나의 한계(작은 키)를 기꺼이 뛰어넘는 '구체적이고 별난 노력'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을 만난 모든 이는 이 '자기만의 돌무화과나무'를 가지고 있습니다. 
 
저에게도 저만의 '돌무화과나무'가 있었습니다. 저는 대학생 때, 남들보다 예수님을 더 깊이,
더 생생하게 알고 싶었습니다.
그때 제 눈에 들어온 것이 바로 마리아 발토르타의『하느님이시요,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였습니다. 
 
남들이 모두 비웃고 이단 시비까지 하던 그 책을, 저는 5년 동안 매일 조금씩이라도 읽었습니다.
그것은 저의 '돌무화과나무'였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보려고, 남들이 하지 않는 그 '별난 노력'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제 마음에 들어오셨습니다. 저는 갈등했습니다.
지금 가는 길을 가야 할까, 아니면 제자의 길을 가야 할까?
그리고 자캐오처럼 이전에 추구하던 것을 버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신학교에 들어갔습니다.
그러자 그분이 제 안에 들어오셨습니다.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주었다!”
비로소 예수님께서 제 안에 사시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예수님을 만나고 싶다"고 말하면서, 아무런 '돌무화과나무'에도
오르지 않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입으로는 주님을 찾는다면서, 남들이 하는 만큼(군중)만 하고, 내 한계(작은 키) 안에만 머무른다면 결코 주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돌무화과나무'는 무엇입니까?
남들보다 10분 더 바치는 아침 기도입니까? 남들이 꺼리는 봉사활동입니까?
아무도 안 알아줘도 매일 읽는 성경 한 장입니까? 
 
그것이 무엇이든, 지금 당장 그 나무를 향해 달려가십시오.
체면을 버리고 그 나무에 오르십시오.
그때 비로소 주님께서 가던 길을 멈추시고, 여러분을 올려다보시며, 여러분의 이름을 부르실 것입니다. 
 
"아무개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그러면 여러분은 이전의 삶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모시고 엘리사벳을 찾아보시는 성모님과 같은 삶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신고사유를 간단히 작성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