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루카 23,35-43: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1. 전례의 완성: 십자가에서 드러난 왕권
오늘은 전례력의 마지막 주일, 곧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왕 대축일”이다. 이 대축일은 단순히 한 해의 끝이 아니라, 구원의 역사가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는 절정을 드러낸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모든 피조물을 당신 안에서 새롭게 하셨다(에페 1,10). 그분의 왕권은 세속의 권세나 무력의 지배가 아닌, 사랑과 자비, 그리고 십자가의 봉헌에서 나온 왕권이다. 성 암브로시오는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의 왕좌는 십자가이며, 그분의 왕관은 가시로 된 것이다. 그러나 그 가시의 왕관이야말로 하늘과 땅을 다스리는 진정한 영광의 상징이다.”(De Fide II,16,133)
2. 십자가 아래에서 드러난 왕의 모습
오늘 복음은 역설적이다. 왕의 모습이 아니라 패배자처럼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 그러나 그 안에서 참된 왕권이 드러난다. 지도자들과 군인들이 외친다. “이자가 하느님의 메시아라면, 자신이나 구원해 보라.”(루카 23,35-37) 그들의 조롱은 세속적 왕권의 논리에 기반한다. “왕이라면 힘이 있어야 하고, 자신을 지킬 줄 알아야 한다.”는 세상의 논리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자신을 구원하지 않음으로써 인류를 구원하신 왕”이시다. 그분의 힘은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의 능력, 그분의 통치는 자비로 다스리는 다스림이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말한다. “주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왕으로서 다스리셨다. 그분의 못박힘은 그분의 승리이며, 그분의 죽음은 우리의 생명이다.”(Sermo 218,2)
3. 두 강도: 왕을 알아본 믿음의 눈
복음의 중심은 두 강도에 관한 이야기이다. 한 사람은 조롱하지만, 다른 한 사람은 십자가 위의 왕을 알아본다. 그는 회개하며 이렇게 고백한다.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42절) 이 고백은 단순한 두려움이나 구원의 욕망이 아니라,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신앙고백이며 기도이다. 그는 십자가 위에서 이미 왕국이 시작되고 있음을 본 것이다. 예수님은 즉시 대답하신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43절) 이 ‘오늘’은 단순한 시간의 하루가 아니라, 구원의 결정적인 순간, 곧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모든 인류에게 열린 하느님 구원의 오늘이다. 바로 이 순간에 하늘나라의 문이 열렸다. 회개한 죄인이 낙원에 들어간 최초의 사람이라는 사실은, 그리스도의 왕권이 죄인을 구원하는 자비의 왕권임을 드러낸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를 이렇게 해석한다. “그 강도는 열쇠도, 공로도, 선행도 없었으나, 믿음으로 하늘나라의 문을 열었다. 주님은 그를 왕국의 첫 시민으로 맞이하셨다.”(Hom. in Lucam 23)
4. 그리스도의 왕국: 사랑과 자비의 질서
바오로 사도는 오늘 제2독서(콜로 1,12-20)에서 그리스도의 왕권을 우주적 차원으로 확장하여 노래한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어둠의 권세에서 구해내시어, 당신의 사랑하시는 아드님의 나라로 옮겨 주셨습니다.”(콜로 1,13) 이 “아드님의 나라”는 단순히 미래의 천상 왕국이 아니라, 지금 우리 안에서 이미 시작된 사랑과 은총의 질서이다. 그리스도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콜로 1,15)으로서, 모든 피조물의 시작과 마지막이 되신다. 모든 만물이 그분 안에서, 그분을 통해, 그분을 향해 존재합니다(콜로 1,16). 성 이레네오는 이렇게 노래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만물은 새롭게 창조되었다. 그분은 새로운 아담이시며, 우리 안에 하느님의 통치를 다시 세우신 분이시다.”(Adv. Haer. III,22,3)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왕권은 우주적 재창조의 질서, 곧 모든 것을 그분 안에서 하나로 통합하시는 사랑의 권능이다.
5. 교회의 사명: 그리스도의 통치를 드러내는 몸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왕권을 교회를 통해 드러내신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그분은 그 머리이시다(콜로 1,18). 머리로서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생명의 힘을 교회 안에 흘려보내시며, 모든 구성원을 진리와 사랑 안에서 하나로 묶으신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왕권은 교회를 통하여 역사 안에서 실현된다. 이 통치는 강제나 권력이 아닌, 사랑과 섬김, 그리고 화해의 봉사로 실현된다. 교회 헌장은 이를 이렇게 표현한다. “그리스도께서 진리와 생명의 임금으로 오셨듯이, 신자들도 죄와 죽음의 세력을 이기고 세상을 봉사로 다스림으로써 그분의 왕직에 참여한다.”(36항)
6. 결론: 낙원의 약속, 오늘의 부르심
오늘 복음의 마지막 말씀은 단순한 약속이 아니라, 우리 각자에게 주어지는 초대의 말씀이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43절) 그리스도의 왕국은 먼 미래가 아니라 오늘의 사건이다. 우리가 지금, 이 순간, 그분의 사랑과 자비를 선택할 때, 우리는 이미 그분의 낙원 안에 서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 위의 임금을 바라보며, 그분의 자비를 믿고, 그분 사랑의 통치에 기꺼이 자신을 맡기며, 그분의 은총 안에서 세상을 섬기는 백성이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왕권은 강제의 왕권이 아니라 초대의 왕권이다. 그분은 우리를 억누르지 않고, 자유롭게 사랑하게 하신다. 우리가 그분의 왕국을 따르는 길은 오직 하나, 십자가의 길, 자비의 길, 사랑의 길이다.
“주님, 온 천하의 왕이신 그리스도의 계명을 기꺼이 따르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스러운 하늘나라에서 끝없이 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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