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카 23,35ㄴ-43
나의 기도는 시험하는 기도인가, 기억하는 기도인가?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의 단편 『세 은자』에는 아주 기묘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외딴섬에 세 명의 노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글도 모르고 교리도 몰랐습니다.
그저 하루 종일 손을 모으고 이렇게만 기도했습니다.
"하느님, 당신도 셋, 우리도 셋,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어느 날 그 섬을 방문한 주교가 이 기도를 듣고 혀를 찼습니다.
"어허, 그렇게 기도해서는 하느님께 닿지 않습니다.
제가 정식 기도를 가르쳐 드리지요." 주교는 하루 종일 땀을 흘리며 그들에게 '주님의 기도'를 가르쳤습니다.
노인들은 머리가 나빠 외우는 데 한참이 걸렸지만, 주교는 뿌듯해하며 배를 타고 섬을 떠났습니다.
배가 바다 한가운데 이르렀을 때였습니다.
저 멀리서 무언가가 물보라를 일으키며 배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습니다.
자세히 보니 그 세 은자가 물 위를 달리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들은 숨을 헐떡이며 배전에 매달려 소리쳤습니다.
"주교님! 죄송합니다.
주교님께서 가르쳐주신 그 거룩한 기도문을 그새 까먹었습니다.
처음 구절이 '하늘에 계신...'이었는데 그 다음이 기억나지 않습니다.
부디 다시 가르쳐주십시오!"
주교는 물 위를 서 있는 그들을 보며 전율했습니다.
그리고 십자 성호를 그으며 말했습니다.
"어르신들, 당신들의 기도는 이미 하늘에 닿았습니다.
제가 당신들에게 배울 뿐, 더 가르칠 것이 없습니다. 하던 대로 기도하십시오."
이 이야기는 오늘 우리에게 묵직한 질문을 던집니다.
완벽한 기도문을 외우지만 왕의 능력을 모르는
주교와, 교리는 서툴러도 왕에 대한 절대적 신뢰로 물 위를 걷는 은자들.
과연 누가 하느님을 살아있는 왕으로 모시는 사람입니까?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왕 대축일'을 지냅니다.
우리가 그분을 왕으로 모시는지, 아니면 단순히 내 소원을 들어줄 해결사로 여기는지는 '기도하는 방식'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옛이야기에 두 거지가 나옵니다.
왕이 행차할 때마다 한 거지는 "우리 왕 만세!"라고 외쳤고, 다른 거지는 "왕의 선물 만세!"라고 외쳤습니다.
왕은 자신을 사랑한 첫 번째 거지에게는 빵 속에 보석을 숨겨 보냈고, 선물만 바란 거지에게는 그냥 빵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첫 번째 거지는 빵이 무거워 팔아버렸고, 선물만 찬양하던 거지가 그 빵을 사서 횡재했습니다.
언뜻 보면 선물을 바란 자가 이긴 것 같지만, 결국 왕은 진실을 알고 첫 번째 거지를 궁으로 불러들여 식탁에 앉혔습니다.
선물만 바란 거지는 평생 구걸을 면치 못했습니다.
우리가 바치는 '주님의 기도'는 어떻습니까? C.S. 루이스는 『스크루테이프의 편지』에서 악마의 전략을 이렇게 폭로합니다.
"인간이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소서'라고 기도할 때, 그 뜻이 사실은 '내 뜻'과 일치한다고 착각하게 만들어라.
그래서 만약 그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마치 하느님이 계약을 위반한 것처럼 분노하게 만들어라."
이것은 명백한 '시험하는 기도'입니다.
"하느님, 당신이 진짜 왕이라면 내 병을 고쳐보십시오.
내 자식을 합격시켜 보십시오." 이것은 간청이 아니라 거래이며, 왕의 권위에 도전하는 오만입니다.
복음서에서 이런 화법을 쓴 존재는 광야의 사탄뿐입니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을 빵으로 만들어 보시오."
사탄은 끊임없이 "If(만약 ~라면)"라는 조건을 달아 하느님을 증명하라고 요구합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이런 태도를 엄중히 꾸짖습니다.
"자매들이여, 왕이신 분께 고작 썩어 없어질 돈이나 명예를 달라고 조르지 마십시오.
그것은 거지나 하는 짓이지, 왕의 자녀가 할 기도가 아닙니다.
우리가 청해야 할 양식은 오직 하느님의 뜻, 그리고 성체이신 예수님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시험하는 기도'를 멈추고, 그분을 왕으로 인정하는 '기억하는 기도'로 나아갈 수 있을까요?
그 방법은 역설적이게도 "확신이 들 때까지 기도를 멈추지 않는 것"입니다.
구약의 판관 기드온을 보십시오.
그는 하느님께 양털이 젖게 해달라고, 다음엔 마르게 해달라고 두 번이나 시험했습니다.
이것은 불신앙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당신이 나의 왕이심을 확신하고 싶습니다"라는 처절한 몸부림이었습니다.
그는 확신이 들 때까지 멈추지 않았고, 마침내 하느님을 왕으로 모시고 전쟁에 나갔습니다.
배우 최강희 씨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녀가 우울증과 중독의 늪에서 바닥을 쳤을 때, 그녀는 체면을 버리고 짐승처럼 울부짖었습니다. "살려주세요... 제발 살려주세요." 그녀는 응답이 올 때까지, 자신이 살 수 있다는 확신이 들 때까지 이 기도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끈질긴 기도는 결국 그녀에게 "하느님이 나를 살리셨다"는 확신을 주었고, 그때부터 그녀의 삶에 왕의 통치가 시작되었습니다.
이렇게 확신이 들 때까지 멈추지 않고 기도하는 자에게는 반드시 영혼을 태우는 '불(Fire)'같은
체험이 찾아옵니다.
천재 수학자 블레즈 파스칼은 그 뛰어난 이성으로 신을 증명하려 했지만 끝내 공허함만 남았습니다. 그러나 1654년 11월 23일 밤, 기도를 멈추지 않던 그에게 성령의 불이 떨어졌습니다.
그는 그 체험을 양피지에 적어 죽을 때까지 가슴에 품고 다녔습니다.
"불(FEU)! 철학자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하느님... 확신, 확신, 기쁨, 평화."
그는 더 이상 신을 증명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날 밤의 불을 '기억'하며 자신의 모든 지성을
왕의 제단에 바쳤습니다.
증명이 끝난 곳에서 확신이 시작된 것입니다.
저도 신학교 시절, 이와 똑같은 체험을 했습니다. 그전까지 제 기도는 온통 "이것 좀 주십시오, 저것 좀 해결해 주십시오"라며 당신이 주님임을 증명해 보라는 시험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성체 조배 중에 주님의 벼락같은 음성을 들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물과 피를 다 쏟으신 예수님께서 제 영혼에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너에게 다 주었다.
생명도, 살도, 피도 다 주었다. 더 무엇을 증명해야 하느냐?"
그 순간 저는 와르르 무너져 내렸습니다.
이미 생명까지 다 주신 분께, 고작 사탕발림 같은 위로를 내놓으라고 떼를 쓰고 있었던 제 자신이 너무나 부끄러웠습니다.
그분의 압도적인 '다 주심'을 깨닫는 순간, 저는 더 이상 다른 것을 청할 염치조차 없었습니다.
이미 다 받았는데 무엇을 더 달라고 하겠습니까? 그때부터 제 기도는 오직 하나, '주님의 기도'로 바뀌었습니다.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소서." 다 주신 분의 뜻이라면, 그것이 가장 좋은 것임을 믿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왕을 시험하는 기도는 "내 뜻을 이루어 달라"고 떼를 쓰지만, 왕을 인정하는 기도는 "이미 다 주셨음을 기억합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밤새도록 기도할 때, 다른 화려한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주님의 기도'의 첫 구절,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만 수없이 반복하다가 날을 샜다고 합니다.
하느님이 나의 아버지가 되시고 나의 왕이 되신다는 그 사실 하나가 가슴 벅차게 차올라,
감히 다음 구절로 넘어갈 수조차 없었던 것입니다.
그에게는 주님의 기도 하나만으로도 차고 넘쳤습니다.
이제 우리의 기도가 바뀌어야 합니다. 기드온처럼, 최강희 씨처럼, 그리고 파스칼처럼
확신이 들 때까지 매달리십시오.
"주님, 당신이 왕이심을 제 영혼이 알게 해 주십시오."라고 청하십시오.
그래서 마침내 "아, 그분은 나에게 다 주셨구나!"라는 것을 깨닫는 날, 여러분은 더 이상 청원 목록을 들고 계산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혹시 내가 청한 것이 이루어지지 않아도 실망하지 마십시오.
왕께서는 이미 나에게 가장 필요한 '당신 자신'을 주셨습니다.
그 믿음 안에서 바치는 '주님의 기도'야말로, 우리가 그분을 진정한 왕으로 모시는 대관식입니다. 아멘.
신고사유를 간단히 작성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