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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12월 7일 _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작성자 : 홍보국 작성일 : 2025-12-07 조회수 : 49

복음: 마태 3,1-12 
 
제2의 세례자 요한으로 사셨던 프란치스코 교황님! 
 
 
대림 시기 때 마다 자주 등장하는 주요 인물 중의 한 분이 세례자 요한입니다.
그의 옷차림이며 생활방식이 얼마나 청빈하고 소박했으면, 복음사가들마다 그의 과도하게 없어 보이는 행색을 지적합니다. 
 
“요한은 낙타 털로 된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둘렀다.
그의 음식은 메뚜기와 들꿀이었다.”(마태 3,4) 낙타 털로 된 옷, 가죽 띠, 메뚜기, 들꿀...이런 표현들은 세례자 요한의 극도로 제한되고 겹핍된 삶을 수식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주 경험하는 것처럼 먹고 싶은 것 다 먹고 살고, 누리고 싶은 것 다 누리고, 즐길 것 다 즐기며 살아갈 때, 다시 말해서 물질적 풍요 속에 살아갈 때, 따라오는 한 가지 위험 요소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능력, 자신의 힘, 자신이 지닌 재물에 의존하게 됩니다.
하느님의 뜻, 그분의 섭리는 뒷전으로 밀려납니다.
하느님 없이도 충분히 살 수 있다고 믿으며 살아가던 어느 날, 크게 뒤통수를 얻어맞게 될 것입니다. 
 
오시는 주님을 보다 신속히, 그리고 정확하게 알아보기 위해서는 세례자 요한처럼 결핍과 추위,
배고픔과 목마름이 필요한 것입니다.
따지고 보니 수시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가난과 고통, 배고픔과 목마름 앞에 너무 괴로워할 일이 아닙니다.
물론 지나친 결핍은 우리에게 굴욕과 비참을 느끼게 하지만, 어느 정도의 결핍은 우리를 하느님께로 나아가게 하는 도구가 됩니다. 
 
교회는 대림 제2주일을 인권 주일 겸 사회 교리 주간으로 정했습니다.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가난은 영예요 기쁨이지만, 어쩔 수 없이 맞이하게 되는 비자발적 가난은 씻을 수 없는 오욕이요 슬픔으로 다가옵니다. 
 
주변을 둘러보면 어쩔 수 없는 이유로, 태생적 한계로 비자발적 가난에 노출된 수많은 이웃이 신음하고 있습니다.
오늘 대림 제2주간은 그런 이웃들의 인권을 존중하고, 우리 교회가 그들을 보다 적극적으로 동반하고 연대하기 위해 노력하는 시기입니다. 
 
사회 교리! 말만 꺼내도 귀를 막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도 한 본당 특강 때 사회 교리를 조금 언급했더니 몇몇 분들이 즉시 노골적인 반기를 들고 불편한 얼굴 표정을 짓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사실 사회 교리는 이 시대 가장 강조되어야 할 소중한 교리입니다.
사회 교리는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들을 포함한 모든 하느님 백성의 구성원들이 자신이 몸담고 있는 구체적인 사회 현실 안에서 어떻게 하느님을 증거하고, 하느님 나라를 선포할 것인가를 고민하게 초대합니다. 
 
제정신이 아닌 지도자로 인해 세세대대로 보존되어야 할 금수강산이 갈기갈기 찢어지고,
굽이굽이 전 국토를 흘러 적시는 아름다운 강줄기를 잔인하게 토막 내 버릴 때, 그것은 교회 밖 일이니 상관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인이기를 포기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뭐가 뭔지 아무것도 파악하지 못하는 지도자로 인해 국격이 완전 밑바닥으로 곤두박질치고 있는데, 그들이 만든 그릇된 제도로 인해 가난한 백성들의 신음 소리가 하늘을 찌르는데, 그것은 남의 일이라 여기고, 높은 교회 담 안에서 우리끼리 희희낙락하고 있다면, 그것은 하느님의 얼굴을 욕되게 하는 일입니다. 
 
이런 연유로 이제는 하늘의 찬란한 별이 되신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정말이지 일관되게, 끊임없이 외치셨습니다. 
 
“여러분들, 제발 교회와 수도회 담 너머로 나가십시오.
안에서 안전하게 머무는 것보다 밖으로 나가서 상처입고 고통당하는 것이 백배 천배 더 낫습니다.” 
 
교황 착좌 이후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계속 반포하셨던 일련의 회칙들의 주된 골자는 한결같이 사회 교리와 맥을 같이 하고 있습니다.
우리 시대 또 한분의 대 예언자, 제2의 세례자 요한으로 사셨던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참으로 그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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