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오 3,1-12
교회는 ‘희망’을 길들이는 새로운 세례자 요한
태국의 한 감동적인 광고 영상이 있습니다. 사춘기 소녀가 엄마와 다투고 가출을 합니다.
배는 고픈데 수중에 돈은 한 푼도 없습니다. 볶음밥 가판대 앞을 서성이는 소녀를 보고 주인아줌마가 갓 볶은 따뜻한 밥을 내어줍니다. "돈은 됐다. 그냥 먹어라."
소녀는 허겁지겁 밥을 먹다가 숟가락을 멈추고 눈물을 뚝뚝 흘립니다.
볶음밥에 양파가 빠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소녀는 양파를 싫어해서 엄마는 늘 양파를 빼고 볶음밥을 해주셨거든요.
이상하게 여긴 소녀에게 아줌마가 말합니다.
"네 엄마가 다녀갔단다.
혹시 네가 오면 밥을 해 먹이라고 돈을 맡기고 갔어. 양파는 빼고, 계란 후라이는 반숙으로 해달라고 신신당부하더라."
소녀는 밥을 먹으며 깨닫습니다.
내 뜻대로 살기 위해 집을 나왔지만, 엄마의 사랑이 있는 집이 여기보다 훨씬 행복한 곳이라는 것을요.
소녀는 밥그릇을 놓고 아줌마에게 핸드폰을 빌려 엄마에게 전화를 겁니다.
이 광고 속의 '볶음밥 아줌마'가 바로 오늘 복음에 나오는 '세례자 요한'입니다.
아줌마는 자신이 엄마인 척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소녀에게 엄마의 사랑을 맛보게 해 주고, 집으로 돌아갈 용기를 주었습니다.
저에게도 그런 세례자 요한이 있었습니다.
저는 일반 대학을 다니던 시절, 겉으로는 평범해 보였지만 속으로는 세상이 줄 수 없는 더 큰 행복을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우연히『하느님이시요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라는 책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무려 5년 동안 그 책을 읽었습니다.
그 책 속에 묘사된 예수님과 제자들의 삶은 세상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행복한 모습이었습니다.
그 책은 저에게 볶음밥 아줌마였습니다.
"이 세상의 행복을 버리고 사제가 되면, 제자들처럼 저런 완전한 행복을 누릴 수 있겠구나."
그 희망을 보았기에 저는 세상의 행복(대학, 성공)을 미련 없이 버리고 신학교라는 광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형제자매 여러분, 여기서 중요한 질문이 생깁니다.
"왜 어떤 이들은 세례자 요한을 알아보고 행복을 찾아 떠나는데, 왜 어떤 이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할까요?"
오늘날 많은 사람은 "행복하고 싶다"고 말은 하지만, 정작 행복을 찾아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저 자기 처지에서 불평만 하며 주저앉아 있습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학습된 무기력'이라고 합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익숙한 불행에 중독된 것'입니다.
어느 나그네가 툇마루 밑에서 계속 낑낑거리는 개를 보고 주인에게 물었습니다.
"저 개는 왜 저렇게 웁니까?" 주인이 무심하게 답합니다.
"아, 깔고 앉은 자리에 삐죽 튀어나온 못(Nail)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그럼 일어나면 되지 않습니까?" "일어날 만큼 아프지는 않으니까요.
그냥 낑낑대며 불평할 정도만 아픈 겁니다."
우리 모습이 이렇지 않습니까?
사는 게 힘들고 허무하다고 불평하지만, 박차고 일어나 세례자 요한을 찾아갈 만큼 간절하지는 않습니다.
영화 『쇼생크 탈출』에서 40년 넘게 복역한 장기수 레드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 감옥 벽이란 게 참 웃기지. 처음에는 미워하다가, 차츰 익숙해지고, 세월이 지나면
결국 의지하게 되거든. 그게 바로 '길들여진다(Institutionalized)'는 거야."
세속의 삶은 감옥이지만, 우리는 그곳에 길들여졌습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이 와서 "회개하라, 더 큰 행복이 있다!"고 외쳐도, 그 변화가 두려워 귀를 닫아버립니다.
불평하는 것이 도전하는 것보다 편하기 때문입니다.
[전개 3] 정글 속의 런던 지하철 노선도 그렇다면 이 무기력을 깨고 일어날 힘은 어디서 올까요? 바로 '희망'입니다.
그런데 이 희망은 막연한 낙관이 아니라, 내가 이미 맛보았던 행복에 대한 구체적인 '기억'에서 나옵니다.
아프리카 밀림 지대에서 부대가 전멸하고 홀로 남은 병사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도 죽었으려니 했습니다.
그런데 6개월 뒤, 그 병사가 혈혈단신으로 밀림을 헤치고 구조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손에 꽉 쥐고 있던 꼬깃꼬깃한 지도를 보고 감탄했습니다.
"역시 지도가 있어서 살았구나!"
하지만 그가 펼쳐 보인 지도는 밀림의 지도가 아니었습니다. '런던 지하철 노선도'였습니다.
그는 길을 찾기 위해 지도를 본 것이 아니었습니다.
고통스러울 때마다 그 지도를 보며 생각했습니다.
"나는 런던에서 저 지하철을 타고 출근했었지. 주말에는 저 역에서 내려 데이트를 했었지.
나는 그 행복을 안다.
나는 반드시 살아서 그곳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에게 런던 지하철 지도는 종이 조각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이미 살아보았고 체험했던 '확실한 행복의 증거'였습니다.
그 행복의 기억이 정글의 고통을 이기게 했습니다.
어려서부터 이런 작은 희망의 성취를 맛본 사람은, 성인이 되어서도 더 큰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무기력이 학습되듯이, 희망도 학습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교회는 무엇을 하는 곳입니까? 교회는 세상 사람들에게 '희망을 학습시키는 곳',
곧 세례자 요한이 되어야 합니다.
세례자 요한이 광야에서 꿀과 메뚜기만 먹으며 절제했듯이, 교회는 우리에게 세속, 육신, 마귀(삼구)를 끊어보라고 가르칩니다.
"십일조를 내어보십시오.
돈에 대한 집착을 끊으면 더 자유로워집니다."
"미운 사람을 용서해 보십시오.
자존심을 꺾으면 평화가 옵니다."
"봉사하고 나누어 보십시오.
몸은 힘들어도 기쁨이 솟아납니다."
이런 가르침이 부담스럽습니까?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런던 지하철 노선도를 쥐여주는
훈련입니다.
세속, 육신, 마귀를 끊고 노력하면 더 행복해진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체험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런 체험이 없는 신자는, 단팥빵을 먹어보지 못한 아이처럼 결정적인 순간에 하느님을
신뢰하지 못합니다.
지금 교회가 위기인 이유는, 세속·육신·마귀를 끊으라는 세례자의 가르침은 사라지고,
"복 받으세요, 부자 되세요"라는 세상의 희망만 팔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요?
세상과 똑같은 행복을 주는 교회라면 굳이 존재할 필요가 없습니다.
희망을 주지 못하는 부모가 버림받듯, 세속적 희망만 주는 교회는 필요 없어집니다.
'체나콜로(Cenacolo) 공동체' 이야기를 해드리고 싶습니다.
전 세계의 마약 중독, 알코올 중독 청년들이 모여 사는 가톨릭 공동체입니다.
이곳엔 TV도, 핸드폰도, 약물 치료도 없습니다.
오직 '기도'와 '노동'뿐입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감옥입니다.
그곳에 페데리코라는 청년이 들어왔습니다.
그는 심각한 마약 중독자였고, 삶의 의미를 잃은 채 죽지 못해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처음에 그곳의 규칙을 견딜 수 없어 도망치려 했습니다.
"왜 나를 가두느냐"고 반항했습니다.
하지만 공동체의 형제들은 그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를 위해 밤새 기도해주고, 묵묵히 밭을 갈며 땀 흘리는 기쁨을 보여주었습니다.
페데리코는 형제들의 눈빛에서, 마약이 주는 쾌락과는 비교할 수 없는 '진짜 평화'를 보았습니다.
그는 세속의 쾌락(마약)을 끊고, 육신의 편안함을 끊고(노동), 마귀의 유혹을 끊는(기도) 치열한
싸움을 시작했습니다.
그 고통의 과정을 통과했을 때, 그는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나중에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세상은 나에게 마약을 주며 잠시의 쾌락을 팔았지만, 이곳은 나에게 고통을 통해 영원한 기쁨을 얻는 법을 가르쳐주었습니다. 나는 여기서 다시 태어났습니다."
교회는 이런 곳이어야 합니다.
교회는 세상의 못 위에 앉아 낑낑대는 사람들을 일으켜 세워, "세속, 육신, 마귀를 끊으면 진짜 행복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세례자 요한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이번 대림 시기, 세상의 쾌락을 끊고 사랑을 실천하는 '거룩한 불편함'을 감수하십시오.
그 작은 승리의 체험들이 모여, 여러분을 구원자 예수님께로 이끄는 가장 확실한 희망의 지도가 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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