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오 11,28-30
야생마가 날뛰는 동안 조련사는 등에서 내려오지 않습니다
[도입] 복수심에 먹힌 영혼, 에이합 선장
허먼 멜빌의 고전 소설 『모비 딕』에는 거대한 흰 고래에게 한쪽 다리를 잃은 에이합 선장이
등장합니다.
다리를 잃은 상실과 육체의 고통은 그에게 겸손과 자연에 대한 경외심을 가르칠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고통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그는 고래에 대한 광기 어린 복수심에 사로잡혀, 선원들의 만류와 불길한 징조들, 그리고 하느님의 경고를 모두 무시했습니다.
그는 하늘을 향해 이렇게 외치며 하느님의 질서에 대항했습니다.
"태양을 쳐서 떨어뜨릴 수만 있다면, 나는 태양이라도 칠 것이다!"
결국 그는 자신의 작살 밧줄에 목이 감겨 고래와 함께 바닷속 깊은 곳으로 끌려들어 갔고, 그의 배와 선원들을 모두 파멸시켰습니다.
고난을 수용하지 못한 분노는 자신뿐만 아니라 이웃까지 침몰시킵니다.
고난 앞에서 온유해지지 못하고 뻣뻣하게 고개를 든 결과는 파멸이었습니다.
[전개 1] 신을 죽이고 미쳐버린 초인
이러한 비극은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에게서도 발견됩니다.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니체는 평생 극심한 편두통과 시력 저하, 위장병에 시달렸습니다. 육체의 가시는 그를 겸손한 신앙으로 이끌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고통을 주는 신을 거부하고 "신은 죽었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는 고난받는 인간이 하느님께 의지하는 것을 나약함으로 치부하고, 스스로 운명을 개척하는
'초인(Übermensch)' 사상을 주장했습니다. "신이 어디 갔느냐고? 내가 말해 주지!
우리가 신을 죽여버렸다. 나와 너희들이!"
그러나 하느님의 멍에를 벗어던진 인간 정신은 그 무게를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말년에 광기에 사로잡혀, 토리노의 길거리에서 매질 당하는 말을 끌어안고 울부짖다가 정신병원에서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습니다.
멍에를 거부한 자의 자유는 진정한 자유가 아니라 파멸이었습니다.
[복음]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우다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라고 초대하십니다. 그런데 그 안식의 조건이 있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안식은 짐을 벗어버리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그분의 온유함과 겸손함을
배우는 데서 옵니다.
히브리서는 예수님에 대해 이렇게 증언합니다.
"그분께서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히브 5,8).
하느님의 아드님조차 고난을 통해 순종을 완성하셨다면, 하물며 우리에게 고난은 하느님의 뜻에 길들여지기 위한 필수 과정이 아니겠습니까?
신명기 말씀은 광야의 고통이 우리를 괴롭히려는 것이 아님을 명확히 합니다.
"너희는 주 너희 하느님께서... 광야에서 너희를 인도하신 모든 길을 기억하여라.
그것은 너희를 낮추시고 시험하시어, 뒷날에 너희가 잘되게 하시려는 것이었다."(신명 8,2.16).
광야의 고통은 우리 교만을 꺾고 낮추어(겸손), 복을 받을 그릇으로 만들기 위한 과정입니다.
[전개 2] 이곳이 나의 대성당이다
고난 앞에서 온유해질 때 어떤 기적이 일어나는지 보여주는 분이 있습니다.
베트남의 반 투안 추기경입니다.
젊은 주교였던 그는 공산 정권에 체포되어 빛도 없는 독방에 갇혔습니다.
처음에는 "주님, 제가 밖에서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왜 여기에 썩게 두십니까?"라고
항변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마음을 바꿨습니다.
"나는 하느님의 일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원한다.
이곳이 그분이 원하시는 자리라면 여기가 나의 교구다."
그는 몰래 들어온 포도주 세 방울과 물 한 방울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미사를 드렸습니다.
그가 감옥이라는 현실에 온유하게 순명하자, 그 더러운 독방은 세상에서 가장 거룩한 대성당이 되었고, 그를 감시하던 간수들은 그의 친구가 되었습니다. 그가 고난에 저항하지 않고 받아들였을 때, 고난은 더 이상 그를 가두지 못했습니다.
안식이 시작된 것입니다.
[심화] 야생마와 야곱
몽골의 초원에서 야생마를 잡아 길들일 때, 조련사는 말의 등에 올라타 끝없이 날뛰게 둡니다.
말은 자유를 뺏기지 않으려고 뒷발질을 하고 땀을 비 오듯 흘리며 저항합니다.
이것은 말에게 엄청난 고통입니다.
하지만 말이 탈진하여 거품을 물고, 조련사의 뜻에 저항하는 것을 포기하고 멈춰 서는 순간, 비로소 '교감(Joining up)’이 일어납니다.
그때부터 말의 야성은 파괴되는 것이 아니라, 주인의 신호에 따라 천 리를 달리는 '명마의 능력'으로 승화됩니다.
고난은 우리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우리 힘의 방향을 하느님께로 돌리는 재갈입니다.
구약의 야곱도 평생 잔꾀와 자신의 힘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야뽁 강가에서 천사와 밤새 씨름하다가
엉덩이뼈(힘의 근원)를 얻어맞고 나서야 깨어집니다.
더 이상 제 힘으로 설 수 없게 된 야곱은 천사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집니다.
"당신이 저에게 축복하지 않으시면 놓아 드리지 않겠습니다."
(창세 32,27). 자기 힘이 꺾인(위골된) 그 순간, 그는 '사기꾼 야곱'에서 '하느님과 겨룬 자 이스라엘'로 다시 태어납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당신만을 의지하도록 때로는 우리 힘의 근원을 치십니다.
[결론] 온유해지면 고난이 멈춘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혹시 지금 감당하기 힘든 고난 속에 계십니까?
"왜 나에게만 이런 일이 생기나" 억울하고 분하십니까?
그렇다면 아직 훈련이 끝나지 않은 것입니다. 야생마가 날뛰는 동안 조련사는 등에서 내려오지 않습니다.
고난을 멈추는 유일한 방법은 환경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을 바꾸는 것입니다.
에이합 선장처럼 저항하면 파멸하지만, 반 투안 추기경처럼 온유하게 받아들이면 그곳이 천국이 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괴롭히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당신의 품 안에서 쉬게 하려고 길들이시는 중입니다.
오늘 주님 앞에 무릎 꿇고 이렇게 기도합시다.
"주님, 제 고집을 꺾으소서.
당신의 뜻이 제 안에서 이루어지소서.
이제 저항을 멈추고 당신의 멍에를 메겠습니다."
우리가 온유하고 겸손해지는 바로 그 순간, 고난의 폭풍은 멈추고 주님의 안식이 우리 영혼에 깃들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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