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성당에 와서도 불안할까?
찬미 예수님!
한 주간 평안하셨습니까? 새해 인사를 나눈 지 며칠 지나지 않았는데, 여러분의 마음 기상도는
어떠신지 궁금합니다.
'평안'하십니까, 아니면 여전히 무언가에 쫓기듯 '불안'하십니까?
오늘은 조금 엉뚱한 질문으로 이야기를 시작해볼까 합니다.
여러분, 인간을 가장 간단하게 정의하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철학자들은 '생각하는 동물'이라고 했고, 경제학자들은 '소비하는 동물'이라고도 하고,
사회학자들은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저는 오늘 인간을 이렇게 정의하고 싶습니다.
"인간은 경배하는 동물이다."
조금 거창하게 들리시나요?
사실 아주 본능적인 이야기입니다.
인간은, 아니 모든 살아있는 생명체는 자신의 '생존'을 책임져주는 대상을 본능적으로 알아보고 그 앞에 납작 엎드립니다.
그게 바로 경배입니다.
집에서 강아지 키우시는 분들 계시지요? 강아지가 주인에게 보여주는 행동을 한번 떠올려 보십시오.
주인이 퇴근해서 들어오면 꼬리가 헬리콥터처럼 돌아갑니다.
기분이 좋으면 바닥에 발라당 누워 배를 훤히
드러냅니다.
개에게 있어서 배는 가장 약한 급소입니다.
그걸 보여준다는 건 이런 뜻입니다.
"당신은 나의 생명줄입니다.
당신이 나를 먹여 살리니, 내 생사여탈권을 당신께 맡깁니다."
이게 바로 동물이 보여주는 경배의 원형입니다.
개는 밥을 주는 주인에게 경배하고, 직장인은 월급을 주는 회사에 경배합니다.
1587년 일본, 천하를 호령하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기독교 금지령을 내립니다.
당시 다카야마 우콘은 타카츠키 성의 성주이자, 존경받는 다이묘(영주)였습니다.
그에게는 비옥한 영지(황금)가 있었고, 사무라이로서의 높은 명예(유향)가 있었으며, 자신과 가문을 지켜줄 강력한 군대와 칼(몰약)이 있었습니다.
이것들은 당시 난세에서 살아남기 위한 필수적인 '생존 키트'였습니다.
히데요시는 우콘에게 전갈을 보냅니다.
"신앙을 버리면 더 큰 영지와 관직을 주겠다. 하지만 거부하면 모든 것을 빼앗고 추방하겠다."
주변의 가신들이 울면서 말렸습니다.
"주군, 딱 한 번만 눈 딱 감고 믿지 않는 척하십시오.
그래야 훗날을 도모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생존 본능의 속삭임이었습니다. 우콘 역시 밤새 고민했습니다.
이 칼을 버리면 나는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는데, 내 가족은 어떻게 하나...
하지만 다음 날 아침, 우콘은 놀라운 결단을 내립니다.
그는 사무라이의 자존심이자 신분 그 자체인 머리의 상투(촌마게)를 잘라버립니다.
그리고 허리춤에 차고 있던, 자신의 생명을 지켜주던 '두 자루의 칼'을 풀어 히데요시의 사자 앞에 내려놓습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나의 영지와 나의 칼, 나의 명예를 모두 반납하겠소."
그렇다면 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도착한 유배지 마닐라에서, 하느님은 그를 어떻게 만나주셨을까요?
동방박사들이 아기 예수님을 보고 기뻐했던 것처럼, 우콘에게도 그런 '공현(Epiphany)'이 있었을까요?
1614년 12월, 우콘이 마닐라항에 도착했을 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스페인 총독이 예포를 쏘며 그를 국빈으로 환영했습니다.
그리고 은밀한 제안을 건넸습니다.
"당신에게 무적함대와 군사를 주겠소. 일본으로 돌아가 그들을 정벌하고 영지를 되찾으시오."
이것은 악마의 유혹이자, 그가 버리고 온 '생존의 칼'을 다시 쥐여주겠다는 달콤한 제안이었습니다.
하지만 우콘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습니다.
"나는 무력으로 내 구원을 도모하지 않습니다. 나는 오직 그리스도의 인내와 겸손으로 죽기 위해 이곳에 왔습니다." 그는 총독의 화려한 관저를 마다하고 가장 가난한 이들이 사는 곳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도착한 지 불과 44일 만에 열병으로 쓰러졌습니다.
임종의 순간, 사람들은 그가 고통스러워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모든 것을 잃고 낯선 땅에서 객사하는 처지였으니까요.
하지만 기록에 따르면, 숨을 거두는 우콘의 얼굴은 마치 '엄마 품에 안긴 어린아이처럼' 평온하고 빛이 났다고 합니다.
그가 십자가를 꼭 쥐고 마지막 숨을 내쉬었을 때, 그는 비로소 본 것입니다.
자신의 영지와 칼을 버린 그 빈자리에, 세상이 줄 수 없는 거대한 평화이신 분이 꽉 차 계심을 말입니다.
그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별'은 화려한 일본의 성(城)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내려놓은
그 초라한 병상 위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다카야마 우콘이 체험한 '주님 공현'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동방박사들의 예물도 바로 이 맥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그들이 가져온 황금, 유향, 몰약. 우리는 이것을 비싼 선물로만 생각하지만, 고대 여행자에게
이 세 가지는 낯선 땅에서 살아남기 위한 필수 '서바이벌 키트'였습니다.
'황금'은 어디서든 통용되는 화폐, 곧 경제적 생존 수단입니다.
'유향'은 자신의 권위를 드러내고 악취를 막는, 명예와 품위 유지의 수단입니다.
'몰약'은 상처를 치료하고 시신을 보존하는 비상약, 곧 육체적 생명 보존의 수단입니다.
동방박사들이 아기 예수님 앞에 엎드려 이 보따리들을 풀었다는 것은 단순히 선물을 드린 행위가 아닙니다.
다카야마 우콘이 자신의 칼을 풀어놓은 것과 똑같은 항복 선언입니다.
"주님, 이제부터 제 돈(황금), 제 자존심(유향), 제 목숨(몰약)까지 당신께 맡깁니다.
당신이 없으면 저는 죽습니다."
자신의 생존 수단을 완전히 내려놓는 것, 이것이 바로 '경배(Proskuneo)'의 본질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이탈리아의 작가 에드몬도 데 아미치스의 소설 『쿠오레(Cuore)』에 보면
'엄마 찾아 삼만리'라는 제목으로 더 유명한 짧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주인공인 열세 살 소년 마르코는 이탈리아 제노바에서 아르헨티나까지 엄마를 찾아 지구 반바퀴를 도는 목숨 건 여행을 합니다.
주변 어른들이 말립니다.
"그 작은 몸으로 죽을 수도 있어." 하지만 마르코는 떠납니다.
왜일까요? 엄마가 없으면 어차피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엄마는 마르코에게 단순한 보호자가 아니라 '생존' 그 자체였습니다.
마침내 낯선 병원에서 죽어가던 엄마를 만났을 때, 마르코가 엄마 품에 안겨 보여준 그 표정을 기억하십니까?
그 안도감, 그 평화.
그 순간 마르코에게 세상의 모든 고통은 사라졌습니다.
엄마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맡겼기 때문입니다.
저의 부끄러운 고백을 하나 보태려 합니다.
저 역시 오랫동안 앞서 말씀드린 그 '사나운 개'처럼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겉으로는 사제 지망생이었고 신학생이었지만, 속으로는 주님을 향해 으르렁대고 있었습니다.
'주님, 제가 이만큼 했으니 제 인생 책임져 주셔야 합니다.'
그것은 경배가 아니라 거래였습니다.
제 생존이 조금이라도 위협받는다 싶으면 언제든 주님을 물어뜯을 준비가 되어 있었으니까요. 그러니 늘 불안했고, 주님의 참모습을 뵐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 늦은 나이인 스물여섯 살, 신학교에 입학하던 때가 기억납니다.
세상이 말하는 성공의 사다리, 다카야마 우콘이 내려놓았던 그 화려한 칼과 명예들을 다 내려놓고 진짜 '항복'을 선언했을 때였습니다.
마치 강아지가 배를 까뒤집듯이, 제 가장 약한 부분을 주님 앞에 드러냈습니다.
"주님, 이제 제 생존은 당신께 달렸습니다. 죽이시든 살리시든 뜻대로 하소서."
그때 매일 영하던 성체였는데, 그날따라 주님의 목소리가 제 심장을 관통했습니다.
"그래, 너는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
성체 안의 예수님은 이미 당신의 모든 것, 생명까지도 저에게 내어주신 상태였습니다.
그제야 깨달았습니다.
경배는 곧 '항복'입니다.
항복이 무엇입니까?
전쟁터에서 흰 수건을 들고 걸어 나가는 것입니다.
적의 총부리 앞에 내 생명을 온전히 맡기는 것입니다.
내 손에 든 무기를 버리고 상대의 처분에 나를 맡길 때, 역설적으로 우리는 상대의 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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