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오 4,12-17.23-25
회개한 사람이 물불을 안 가리고 움켜쥐는 것은?
찬미 예수님!
주님 공현 대축일을 지내고, 전례력은 다시 일상의 시간으로 흘러갑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이 잡혔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본격적으로 당신의 사명을 시작하십니다.
그 첫 일성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다가왔다."
여러분, '회개'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흔히 어두운 곳에서 밝은 곳으로 나가는 것을 회개라고 생각합니다.
죄를 씻고 깨끗해지는 것을 떠올립니다.
하지만 오늘 저는 정반대의 이야기를 하려 합니다.
진정한 회개란, '자신의 처참한 어둠을 직시하는 자리로 내려앉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물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음을 뼈저리게 인정하는 것, 그리하여 지푸라기라도 잡으려고 손을 뻗는 그 절박한 상태, 그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제가 영적으로 깊은 어둠 속에 있을 때였습니다. 하느님이 계시는지조차 희미하고, 제 영혼은 갈길 몰라 방황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때 제 손에 잡힌 지푸라기 하나가 있었습니다. 바로 마리아 발토르타가 쓴『하느님이시요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라는 책이었습니다.
어떤 신학자들은 그 책의 신빙성을 의심하고, 어떤 이들은 사적 계시라며 무시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물에 빠져 숨이 넘어가는 저에게 그런 '평가'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 책을 통해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시는 예수님을 만났고, 그 빛에 이끌려 신학교라는,
세상이 보기엔 또 다른 어둠의 골짜기로 제 발로 걸어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비로소 '진짜 빛'이신 주님을 뵈올 수 있었습니다.
저에게 그 책은 예수님을 만나게 해 준 '세례자 요한'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본당의 풍경을 보면 마음이 아플 때가 있습니다.
많은 분이 성당에 오시지만, 정작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고 돌아갑니다.
왜일까요? 그분들이 '물에 빠진 사람'이 아니라,
'육지에 서 있는 심판관'의 자세로 앉아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분들은 끊임없이 '우편배달부'를 평가합니다.
"저 신부님 강론은 너무 길어."
"저 수녀님은 인상이 왜 저래?"
"성경 공부는 지루해."
"이 책은 저자가 별로야."
편지를 간절히 기다리는 사람은 우편배달부의 손때를 보지 않습니다.
배달부의 손톱에 때가 끼었든, 옷이 좀 남루하든, 인상이 험악하든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오직 그가 전해주는 '편지', 그 안에 담긴 기쁜 소식만이 중요할 뿐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당원이었던 오스카 쉰들러를 떠올려 보십시오.
그는 성인군자가 아니었습니다.
술주정뱅이에, 여자를 밝히는 바람둥이였고, 뇌물을 일삼는 속물 사업가였습니다.
겉만 보면 영락없이 '더러운 우편 배달부'였습니다.
하지만 가스실로 끌려가던 유대인들에게 쉰들러의 사생활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쉰들러를 도덕적으로 심판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지금 죽음이라는 어둠 속에 앉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건 쉰들러의 인격이 아니라, 그가 작성한 '리스트(생명의 편지)'에 내 이름이 있느냐 없느냐, 그것뿐이었습니다.
물에 빠진 사람에게 구조자의 손이 깨끗한지 더러운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러시아의 대문호 도스토옙스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시베리아 유형소라는 지옥 같은 어둠 속에
던져졌을 때, 그곳은 살인자와 강도들이 우글거리는 곳이었습니다.
그때 12월 당원(데카브리스트)의 아내들이 그에게 쥐여준 것은 낡고 때 묻은『신약 성경』 한 권이었습니다.
도스토옙스키는 "책이 너무 더럽군. 종이 질이 나쁘군." 하며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 더러운 책을 닳도록 읽고 또 읽었습니다. 그리고 훗날 고백합니다.
"그 지옥 같은 감옥, 그 더러운 책 속에서 나는 비로소 그리스도를 만났다."
그런데 왜 우리는 성당에 와서도 말씀과 성체를 붙들지 못하고, 사제와 이웃을 판단하고 있을까요?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내가 구원이 필요한 존재라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내가 지금 죄의 바다에 빠져 죽어가고 있다는 '자신의 처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육지에 안전하게 서 있다고 착각하기에, 우편 배달부의 손때나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회개하여 자신의 처지를 깨달은 사람은, 타인을 판단할 겨를이 없습니다.
대신 오직 나를 살리는 '말씀'과 '성체'에만 시선을 고정합니다.
여기, 자신이 처한 어둠 속에서 오직 빛만을 바라본 한 사형수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1957년 프랑스, 자크 페슈(Jacques Fesch)라는 27세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은행 강도를 저지르다 경찰관을 살해한 흉악범으로 사형 선고를 받았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이 그를 '살인마'라고 손가락질했습니다.
그 역시 감옥이라는 깊은 어둠 속에서 자신의 죄책감에 짓눌려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 절망의 끝에서 지푸라기처럼 십자가를 붙잡았습니다.
그는 감옥을 수도원으로 바꾸었습니다.
사형 집행이 다가올수록 그는 공포에 떠는 대신, 주님을 만난다는 설렘으로 전율했습니다.
처형 5시간 전, 그는 딸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에 이렇게 썼습니다.
"5시간 후면 나는 예수님을 볼 것이다! 마지막 날, 나는 춤을 추러 가는 것이 아니다...
내 눈은 오직 십자가에!"
단두대의 서슬 퍼런 칼날 앞에서도 그는 사형 집행인의 손(우편 배달부)을 보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죽을 죄인이라는 '처지'를 뼛속 깊이 알았기에, 오직 자신을 구원할 '십자가(편지)'만을 뚫어지라 바라보았습니다.
그는 죽었지만, 교회는 지금 그를 복자품에 올리기 위해 시복 조사를 진행 중입니다.
우리는 지금 물에 빠진 사람입니까, 아니면 뒷짐 지고 배달부의 손때를 지적하는 구경꾼입니까?
나의 처지를 아는 것, 나의 절박함을 깨닫는 것. 그것이 바로 빛을 만나는 첫걸음입니다.
내가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존재임을 깨닫는 것이 우선입니다. 멜 깁슨이 결국 자신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죄인임을 고백하며, 영화에 예수님의 못을 박는 군사의 손으로만 등장한 것이 회개의 예입니다.
회개한 사람은 절대 말씀과 성체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하는 처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뭐라 해도 읽고 묵상하고 조배합니다.
이것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준 분이 바로 '거지 성인' 베네딕토 요셉 라브르입니다.
그는 평생을 씻지 않고 넝마를 걸친 채 로마의 콜로세움 폐허에서 노숙했습니다.
겉모습만 보면 냄새나고 더러운, 영락없는 걸인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피했고, 때로는 미쳤다고 손가락질했습니다.
하지만 라브르는 자신을 조롱하는 사람들을 단 한 번도 판단하거나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눈은 오직 한 곳, 성당의 '감실'에만 고정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하루 종일 성당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성체 안에 계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행복해했습니다.
그에게는 사람들의 인정도, 자신의 명예도 필요 없었습니다.
오직 '성체'라는 생명의 빵 하나면 충분했습니다. 그가 로마의 길거리에서 숨을 거두었을 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로마의 아이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외쳤습니다.
"성자가 돌아가셨다! 거룩한 거지가 돌아가셨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예수님께서는 "회개하여라" 하고 외치십니다.
회개란 표를 보여야 합니다.
그래야 복음을 만날 준비가 된 것입니다.
사제의 강론이든, 우연히 집어 든 신심 서적이든,
혹은 밉상인 이웃의 한마디든, 그 '배달부의 손때' 너머에 있는 주님의 붉은 '편지'를 읽어내려고
노력해 봅시다.
그 지푸라기가 여러분을 빛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그 모든 것들은 결국 말씀과 성체로 우리를 인도하고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성체가 생명이 될 때 생명을 인격적으로 만나게 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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