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오 3,13-17
낮아지면 보이는 것들
찬미 예수님!
오늘은 주님 세례 축일입니다.
복음은 예수님께서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고 물 위로 올라오시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그때 굳게 닫혔던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영이 비둘기처럼 내려오시며 이런 목소리가 들립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이 장엄한 광경은 2천 년 전 예수님께만 일어난 사건이 아닙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던 날, 우리 영혼에도 똑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우리도 하느님의 영을 모시게 되었고, 그분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영적인 귀와 눈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지금 그 눈과 귀가 잘 작동하고 있습니까?
세례 축일이 되면 성당을 장식했던 성탄 트리를 철거합니다.
제가 이곳 조원동 본당에 온 지 벌써 4년째가 되는데, 올해 유독 성당 안팎의 구유와 트리 장식이 예쁘게 느껴져 치우기가 아깝기까지 합니다.
만약 제가 교만하다면 "신부인 내가 사목을 잘해서 봉사자들이 알아서 잘한 거야" 라고 으스댈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마음을 조금만 낮추면 비로소 보입니다. 추운 날씨에 언 손을 호호 불어가며 전구를 달고 구유를 꾸민 봉사자들의 땀과 정성이 말입니다.
하물며 인간의 노력도 낮아져야 보이는데, 하느님께서 지으신 이 세상은 오죽하겠습니까?
겸손한 눈으로 보면, 세상 모든 것 안에 그분의 피와 땀이 서려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분의 숨결인 성령은 비둘기 모양뿐만 아니라, 지나가는 바람, 이름 모를 들꽃, 심지어 우리가 마시는 물 한 모금 안에도 계십니다.
우리가 그것을 보지 못하는 이유는 단 하나, 우리 눈에 '뱀'이 씌었기 때문입니다.
에덴동산에서 하와는 뱀을 바라보느라, 동산 전체에 배어있는 하느님의 사랑을 보지 못했습니다.
뱀은 곧 우리 안의 '교만'입니다.
세례란 무엇입니까? 내 안의 교만이라는 뱀을 물속에 집어넣어 질식시키는 거룩한 결단입니다.
영화 '블랙'은 헬렌 켈러의 실화를 바탕으로 합니다.
주인공 소녀는 보지도 듣지도 못합니다.
세상과 단절된 그녀에게는 오직 '자기 자신'밖에 없습니다.
선생님이 사물마다 이름이 있고 창조 질서가 있음을 가르치려 하지만 소녀는 거부하며 도리어 물을 뿌립니다.
그러자 선생님은 특단의 조치를 취합니다.
소녀를 거칠게 분수대 물속에 처박습니다.
한 번, 두 번, 세 번. 숨이 막히는 그 순간, 소녀의 내면에 있던 고집 센 자아, 즉 '삼구(三仇)'가
죽습니다.
물속에서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존재임을 깨닫는 순간, 비로소 영혼의 눈이 열립니다.
"아, 워터(Water)!"
그녀는 물에도 이름이 있고, 꽃에도 이름이 있으며, 자신에게도 부모가 있음을 깨닫습니다.
이것이 바로 세례의 신비입니다.
교만한 자아가 죽어야 하느님 아버지의 존재가 드러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는 세례를 받고 나서도 자주 눈이 멉니다.
영적인 눈도 사용하지 않으면 퇴화하기 때문입니다.
C.S. 루이스는 그의 책 『순전한 기독교』에서 이렇게 꼬집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언제나 사물과 사람을 깔보느라 아래만 보고 있다.
아래만 보고 있는 사람이 어떻게 저 위에 있는 하느님을 볼 수 있겠는가?"
우리가 다시 눈을 뜨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여기 잊히지 않는 슬프고도 아름다운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옛날 일본에서는 성을 쌓을 때 무너지지 않게 하려고 사람을 기둥 속에 넣는 '인주(人柱)'라는 풍습이 있었다고 합니다.
어느 천민 어머니가 자신의 아이를 사무라이로 키우겠다는 일념으로, 스스로 자원하여 성의 기둥 속에 묻혔습니다.
덕분에 아이는 귀족 아이들과 함께 그 성에서 훈련을 받게 됩니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습니다.
귀족 아이들의 무시와 괴롭힘이 이어지자, 아이는 도망치고 싶어집니다.
내면의 뱀이 "너는 여기서 못 살아, 도망쳐"라고 속삭인 것이지요.
밤몰래 짐을 싸서 도망치려던 아이의 발길이 멈춘 곳은 어느 기둥 앞이었습니다.
바로 어머니가 묻혀 있는 그 기둥이었습니다.
아이는 발을 뗄 수 없었습니다.
내가 여기서 나가면 어머니의 희생은 헛것이 됩니다.
아이는 기둥을 끌어안고 웁니다.
그리고 다시 힘을 얻습니다.
그 후 아이가 힘들 때마다 기둥을 찾아가자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성 전체를 지탱하고 있는 어머니의 피와 사랑이
느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성의 벽돌 하나하나가 어머니의 희생 위에 서 있음을 보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에게 이 '기둥'은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님의 몸과 피가 담긴 '성체'입니다.
아이가 어머니의 죽음으로 사무라이가 될 기회를 얻었듯,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것을 믿고 받아들이는 것이 세례입니다.
하지만 세상살이가 힘들어 도망치고 싶을 때, 우리 안의 뱀이 교만과 절망을 부추길 때, 우리는 다시 기둥 앞으로, 성체 앞으로 와야 합니다.
성체 앞에 머무르며 내 자아를 내려놓을 때,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아, 예수님의 피가 아니면 나는 단 1분 1초도 숨 쉴 수 없구나." 이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면, 성체 안에만 계시던 예수님이 성당 문밖 모든 곳에 계심을 보게 됩니다.
나를 괴롭히는 원수의 얼굴에서도 예수님이 그를 위해 흘리신 피를 보게 됩니다.
그때 비로소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본래 나병 환자를 끔찍이 싫어했습니다.
그러나 회심 후 그는 말에서 내려(지위의 포기) 나병 환자에게 입을 맞추었습니다.
자신이 낮아져 눈높이를 맞추자 그 환자의 얼굴에서 예수님이 보였기 때문입니다.
오래전, 인천에서 만났던 한 할머니 자매님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그분은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삶을 살았습니다. 명문 간호대를 나와 의사 남편과 결혼했고, 개원한 병원은 돈을 긁어모았습니다.
부와 명예가 넘쳐나자 신앙은 뒷전이 되었고,
그 자리에 교만이라는 뱀이 똬리를 틀었습니다. 친구들을 불러 명품을 자랑하는 것이 낙이었습니다.
그러다 대형 의료사고가 터졌습니다.
피해자는 힘 있는 사람이었고, 병원 문을 닫게 하겠다고 협박했습니다.
자매님은 병원이 망하는 것보다, 친구들에게 무시당할 것이 더 두려웠다고 합니다.
용한 점집을 찾아다니며 굿을 했지만 허사였습니다.
결국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성당을 찾았지만, 본당은 창피해서 못 가고 먼 성지를
찾아다녔습니다.
미사가 끝나면 2시간씩 십자가의 길을 바쳤습니다.
처음에는 "해결해 주세요"라고 빌었지만, 기도가 깊어질수록 "나 같은 죄인이 감히..." 하며 낮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십자가의 길 4처, 예수님과 성모님이 만나는 장면에서 벼락같은 음성을 듣습니다.
"사~ 랑~ 한~ 다~"
그것은 귀로 듣는 소리가 아니라, 영혼을 울리는 성령의 파동이었습니다.
자매님은 감실 앞에 엎드려 통곡했습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가장 먼저 한 일은, 자신이 다니던 본당으로 가서 화장실 청소를 시작한 것입니다.
귀한 옷만 입던 병원 원장님이 고무장갑을 끼고 변기를 닦는 모습에 사람들은 놀랐습니다.
그녀가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갔을 때, 꼬여있던 문제들도 기적처럼 풀리기 시작했습니다.
교만해지면 세례는 힘을 잃습니다.
동굴 속 물고기의 눈이 퇴화하듯, 사용하지 않는 은총은 사라집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노력해야 합니다.
영화 '아바타'의 인사말처럼, 하루에도 수백 번 주님을 향해 고백하십시오.
"I see you (저는 당신을 봅니다)."
낮아져야 높이 볼 수 있다는 의로움을 오늘 예수님께서 이루셨습니다.
우리를 위해 요르단 강물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가신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그 겸손의 물에 우리의 교만을 씻어냅시다.
프랑스의 로랑 수사가 부엌에서 설거지하며 하느님의 현존을 연습했듯, 우리도 일상의 작고 낮은 자리에서 주님을 찾읍시다.
우리가 낮아지면, 세상은 하느님의 '진리와 은총'으로 가득 찬 아름다운 정원임이 보일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비로소 죄를 짓지 않고, 미소 지으며 주님을 찬미하는 참된 신앙인이 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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