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을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복음서는 예수님 시대에 이어 제자들을 포함한 목격 증인들의 시대가 지나고 난 다음, 예수님의 목격 증인들의 증언을 기초로 집필된 작품입니다. 따라서 초기 교회가 체험해야 했던 여러 힘든 상황들이 복음서의 배경을 이룰 뿐만 아니라, 복음 저자들이 이러한 상황 극복을 위해 애쓰고 있음을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오늘 마르코가 전하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역시 초대 교회가 극복해야 했던 버거운 현실로부터 영향을 받아 기록된 작품 가운데 하나입니다. 우선 말씀을 뿌리는 선교활동에 최선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결과가 신통치 못했음에 대한 설명이 필요했고, 다음 ‘말씀’이라는 용어의 의미 파악이 절실했습니다.
마르코는 분명히 말합니다: “너희에게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가 주어졌지만, 저 바깥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그저 비유로 다가간다.” 바깥사람들은 마음을 바꾸어 회개하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언뜻 보기에, 이 단정적 말씀은 몇 가지 질문을 떠올리게 합니다. 예수님은 바깥사람들을 단죄하고자 하시는가? 왜 그분은 모든 이에게 동등한 기회를 주시지 않는가? 사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예수님이 직접 그 시대의 청중을 위해서 하신 말씀으로 해석한다면, 우리의 이의제기는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대가 아니라, 초기 교회의 삶의 틀 속에 이 본문을 자리하게 한다면, 앞선 질문들은 정당성을 상실하게 됩니다. 마르코는 예수님의 말씀이 있고 난 다음의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애쓰고 있음이 분명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청중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었으나 이해하지 못하거나 이해하려 하지 않았고, 그분께 대한 믿음 또한 갖추지 못했습니다. 마르코는 이렇게 하나의 탁월한 문학 작업을 통하여 현재를, 다시 말해서 유다 백성이 여전히 교회의 선포를 거부하고 있는 초기 교회의 시대를 반영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예수님이 이미 그렇게 예고하고 그렇게 원하시기나 했던 듯이 말입니다.
결국 마르코는 오늘 비유 말씀을 통하여 구원의 신비스러운 계획이 좋은 결과를 내기 위해서는 인간이 구원의 표징을 읽고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함이 절실하다는 사실을 다시금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근접할 수 없는 곳에 감춰져 있거나 봉쇄된 메시지가 아니라, 열린 마음으로 읽고 이해해야 하는 메시지이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이 비유를 알아듣지 못하겠느냐? 그러면서 어떻게 모든 비유를 깨달을 수 있겠느냐?”
따라서 중요한 것은 우리 각자 예수님의 가르침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자기의 것으로 만들어 신앙을 튼실하게 일구어나가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길바닥이나 돌밭이나 가시덤불이 아니라, 백 배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좋은 땅으로 변화시켜 나아가야겠다는 다짐과 노력이 선행되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볼 수 있는 눈과 들을 수 있는 귀를 갖출 수 있도록, 사랑과 인내로 양성하신 사도들을 신앙의 모범으로 보내주시고, 이들을 기초 삼아 세우신 교회 안에 우리를 불러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마음의 눈을 크게 뜨고 귀를 활짝 열어 예수님의 행적과 가르침을 눈여겨보고 귀 기울여 듣는 신앙인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오늘 하루, 만나는 사람들의 말에 좀 더 귀 기울이고 그들의 바람에 좀 더 눈을 여는 가운데, 신앙인들은 누구보다도 편견 없이 잘 보고 잘 듣는 사람들임을 드러내는, 자랑스러운 하루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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