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하게 살아야 해요. 근원적으로 착해야 합니다. 그래야 일탈이 생기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고 착한 척한다면, 긴장이 풀리는 순간 단 한 번의 일탈이 인생에 돌이킬 수 없는 오점을 만들 수 있습니다. 나아가 이 모든 개인의 정보가 줌인되어 확대되고, 환기되고, 재생될 수 있으므로 앞으로는 ‘일상의 매 순간이 항상 건실해야 한다’라는 삶의 법칙이 각자에게 요구될 것입니다.”(송길영, ‘그냥 하지 말라’ 중에서)
크게 공감 가는 내용이었습니다. 정치인, 연예인, 운동선수 등 소위 공인이라는 사람들이 과거의 일로 나락에 빠지는 일을 너무 자주 보게 되지 않습니까? 특히 정보가 가득한 인터넷 세상 안에서 비밀이란 없어 보입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떳떳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착하게 사는 것이 너무나 당연합니다. 그래서 착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나쁜 성품으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흔적을 남기는 것보다, 착한 성품으로 오히려 손해 보는 편이 낫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자기 욕심과 이기심을 채우는 것보다 사랑의 삶을 사는 것이 자기에게 더 큰 이득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세상 안에 살고 있어서인지 겉으로 보이는 화려하고 풍요로운 것에 더 관심을 두고 있으며 이를 더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착하게 살지 못합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헤로데 임금을 봅니다. 우선 사람들은 예수님의 기적을 보고 세례자 요한, 엘리야, 혹은 옛 예언자 중 하나라고 추측합니다. 그런데 헤로데 임금은 커다란 죄책감을 가지고 있어 보입니다. 그래서 “내가 목을 벤 그 요한이 되살아났구나.”(마르 6,16)라고 말하지요. 죽은 요한이 그의 양심 속에서 계속 살아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는 착한 사람일까요? 나쁜 사람일까요? 양심을 따르는 착한 사람으로 보입니다. 또 그는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두려워하며 보호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진리를 따를 용기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목소리’보다 ‘사람들의 시선’을 더 두려워하는 마음에 세례자 요한을 죽이고 맙니다.
그에 반해 세례자 요한은 타협하지 않는 예언자였습니다. 권력 앞에서도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마르 6,18)라고 직언합니다. 이 직언이 자기의 생명을 위협할 수 있다는 것을 몰랐을까요? 아닙니다. 당시 시대 상황을 살펴보면, 당연히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은 자기 안위보다 하느님의 법을 우선시했습니다.
세상의 권력은 진리를 죽이려 하지만, 진리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헤로데는 요한의 목을 베어서 진리를 이긴 것 같지만, 죄책감으로부터 도망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 역시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각종 이유를 들어 자기의 정당함을 이야기하지만, 그 정당함은 별 볼 일 없는 핑계에 불과합니다. 결국 하느님 앞에 당당한 우리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헤로데의 모습보다 세례자 요한의 모습을 따라야 합니다. 사람들의 시선보다 하느님의 목소리에 더 귀 기울여야 합니다. 계속해서 착하게 살아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도전하는 것은 잠시 발판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도전하지 않는 것은 우리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이다(키에르케고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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