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늦은 때‘란 없어 보입니다. 30대에 “나는 매일 운동해”라고 했던 사람은 4~50대가 되면 아주 튼튼한 몸을 갖게 됩니다. 4~50대에 새로운 일을 시작했지만, 6~70대에 그 분야에 전문가가 되어 이름을 날리는 사람도 봅니다. 제 친구 중에 30대에 수능을 보고 의대에 들어가 지금 의사로 보람 있게 사는 친구도 있습니다. 사실 30대에 수능을 본다고 했을 때, 친구들이 모두 말렸습니다. 늦었다고, 정신을 차리라고…. 그러나 늦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늦었다고 생각했던 우리가 정신 차려야 했습니다.
고민만 하고 있으면 성취도 없습니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 시작해도 늦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고민의 시간을 줄이는 것이고, 그 노력이 분명 나를 새로운 나로 변화시켜 줄 것입니다. 새로운 나로 나아가는 것은 신나는 일입니다. 비록 과정에서 실패를 경험해도 새로움을 경험하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성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글이 있습니다.
“고통을 쌓아야 행복에 가까워지고, 넘어져서 다시 일어나야 뛸 수 있고, 실패의 기록을 남기지 않고 성공으로 가는 법은 없다.”
늦었다는 말을 또 그런 생각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항상 지금 시작하면 됩니다. 꾸준히, 열심히…. 이렇게 살아야 먼 훗날 하느님 나라에서 당당할 수 있지 않을까요? 주님께서 주신 삶, 열심히 살았다고 칭찬받지 않을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말씀을 선포하지 않으십니다. 그저 그곳에 계셨고, 사람들이 만질 수 있도록 허락하십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 1,14)의 육화의 신비를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더군다나 예수님의 치유는 장소에 구애받지 않습니다. 그래서 복음은 ’마을이든 고을이든 촌락이든 예수님께서 들어가기만 하시면‘(마르 6,56)라는 표현을 씁니다. 또 들것에 눕혀 있는 병든 이들이 나오는데, ’들것‘은 가난한 사람들이 사용하던 것입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신분이나 자격에 상관없이 치유하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몰려드는 병자들을 귀찮아하거나 조건을 걸지 않으시고, 단지 믿음을 가지고 손을 뻗는 모든 이에게 자신을 내어주십니다. 그 옷자락 술에 손을 댄 사람은 모두 구원을 받습니다. 그들 중에는 오랫동안 병으로 힘들어하는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포기하고 좌절에 빠져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는 마음을 품은 적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한 번 더 힘을 내서 예수님 옷자락 술을 향해 손을 뻗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예수님의 옷자락 술이 있습니다. 바로 미사 안에서 이루어지는 성체성사 그리고 나의 이웃을 향한 사랑 실천이 주님과 함께할 수 있는 옷자락 술입니다. 그런데 과연 그 옷자락 술에 손을 대는 믿음을 가지고 있나요? 세상일이 바쁘다고, 주님을 도저히 모르겠다고, 그밖에 각종 이유를 붙여서 아예 주님 곁으로 가지 않는 우리가 아닐까요?
오늘의 명언: 우리는 모두 한 사람 한 사람 불가능하면서도 필연적인 존재이다(호프 자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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