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늘 나와 함께 있다.”
루카 복음 15장에서 예수님은 세 가지 비유를 통해 가르치시는데, 그 대상은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 하고 투덜거리는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입니다. 율법에 충실하다 자부하며 의인으로 자처하던 사람들입니다. 죄인들과 결코 섞일 수 없다고 믿었기에, 예수님의 행적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사람들에게 비유를 들어 가르치시며 식탁으로, 기쁨의 식탁으로 초대하십니다.
첫째 비유는(15,3-7) ‘되찾은 양의 비유’입니다. 잃어버린 양을 되찾은 목동이 돌아와 친구들과 이웃들을 기쁨으로 초대하는 비유를, “이와 같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하는 단언으로 끝맺음하십니다. 양을 되찾은 목동의 기쁨에 모두 함께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둘째 비유인(15,8-10) ‘되찾은 은전의 비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서도 친구들과 이웃들이 기쁨에 초대되며, “이와 같이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하느님의 천사들이 기뻐한다.” 하는 예수님의 확언을 다시금 만날 수 있습니다.
마지막 비유를 담고 있는 오늘 복음 말씀은 흔히 ‘탕자(蕩子)의 비유’라 불리는 대목입니다. 앞선 두 비유와 비교해 볼 때, ‘기뻐해야 한다’ 하는 주제에서는 동일하나, 익명성에 관한 한 가지 중요한 차이점이 돋보이며, 그 차이점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이 비유를 통해 일깨우시려는 근본적인 가르침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앞선 두 비유에서 기쁨에 초대되는 대상은 익명의 “친구들과 이웃들”이지만, 이 사람들에게서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의 모습을 찾는 것은 아직 이릅니다. 그러나 마지막 비유에서는, 탕자의 형인 “큰아들”이 잃었던 작은 아들을 되찾은 아버지의 기쁨에 초대되고 있습니다: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
탕자와 아버지와의 관계를 중심으로 이 비유 말씀을 묵상할 때, 회개하는 탕자와 이 아들을 온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아버지의 자비에 중점을 두는 경우가 많으나,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은 이 회개 자체가 아버지의 자비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과, 따라서 회개는 전적으로 아버지의 선물이라는 사실입니다.
한편, 현실적으로 아버지를 떠나 본 적이 없다고 믿던 큰아들, 따라서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하고 자신 있게 항변하는 ‘큰아들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확인합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을 상징하는 큰아들이 잊고 있는 것이 있다면, 따라서 정말 회개해야 할 점이 있다면, 떠나지 않고 충실하게 머물 수 있었음 또한 아버지의 자비에서 비롯된, 아버지의 선물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예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하는 말씀을 늘 가슴에 담고 있어야 했으나, 그러하지 못한 탓에 아우에 대한 아버지의 자비를 받아들이지 못했고, 아들을 되찾은 아버지의 기쁨 또한 마다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결국, 작은아들은 물론 큰아들도 회개가 필요한 존재였으며, 작은아들의 회개와 마찬가지로 큰아들의 회개에도 아버지의 자비가 절대적이었습니다. 회개와 보속의 시기인 은총의 사순시기를 살아가면서, 회개를 위해서는 먼저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전제되어야 하며, 부족한 가운데서도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면 이 또한 아버지 자비의 덕분임을 가슴 깊이 새겨야 할 것입니다.
오늘 하루, 자비하신 하느님 아버지를 향함에서 걸림돌이 될 만한 점들이 있다면 치워버리겠다는 다짐과 아울러, 늘 회개하며 충실하게 신앙의 길을 걸을 수 있음 또한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 덕분임을 깊이 고백하고 감사드리는, 은혜로운 사십 일 가운데 하루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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