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과 불신
예수님 때문에 사람들이 의견의 차이를 보이고 때로 갈라서기까지 하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오늘 복음 속에서 그러한 현실이 발견되는 것을 보면, 예수님 당시에도 그러했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심지어, 같은 하느님을 섬기고, 같은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그리스도교 신자들 사이에서도 동일한 현실이 목격된다는 것은 정말 가슴 아픈 일입니다. 이스라엘 순례 중,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가장 성스러운 장소인 예루살렘의 ‘주님 무덤 기념성당’에 들어가 보면 쉽게 확인할 수 있는 문제입니다. 이 성당 내부 오른쪽 (언덕처럼) 높은 곳에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과 십자가가 세워져 있던 곳이 있고, 성당 중앙에는 묻히시고 부활하신 무덤이 자리하고 있는데, 가톨릭과 정교회 사이에, 나아가 정교회 사이에서도 지분 문제로, 구체적으로는 좁은 공간에서의 영역 문제로 다툼이 만만치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분명 이러한 현실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분열을 가르치거나 조장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신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분열은 엄연한 현실입니다. 인간 공동체가 예수님의 말씀 주제인 정의와 진리와 평화를 거부하면 할수록 분열의 정도는 그 깊이를 더해 갈 뿐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귀 기울여 그대로 실천하려는 자세와 노력으로 참 행복 곧 구원에 다가서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러하지 못하거나 정반대의 방향을 택하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예수님의 신원에 대하여 분분했던 군중의 반응을 적시하고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저분은 참으로 그 예언자시다.” 또는 “저분은 메시아시다.” 하고 말하는가 하면, 어떤 이들은 “메시아가 갈릴래아에서 나올 리가 없지 않은가?” 하며 예부터 전해 내려온, 그래서 그렇게 확신하며 기다려온 메시아와 차이가 있다는 편협한 판단에서 그분이 메시아이심을 거부합니다.
거부하는 세력 가운데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 빠질 수 없습니다. 성전 경비병들에게 “왜 그 사람을 끌고 오지 않았느냐?”라고 힐문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경비병들, 성전의 공공 질서유지를 책임진, 그래서 아마도 교육 정도는 그리 높지 않았던 이 사람들이 가장 의롭고 가장 빛나는 견해를 밝힙니다: “그분처럼 말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하나도 없었습니다.” 이는 예수님은 말씀에 권위가 있으신 분, 권위가 행동에서 나오는 것이기에 그분은 말씀하시는 대로 행동하시는 분임을 천명하는 견해입니다. 이 견해 속에는, 그분은 말만 하고 행동하지 않는 수석 사제들이나 바리사이들, 곧 율법을 가르치는 일에 전념했던 당시의 지도자들과는 전혀 다른 분이라는 확신이 담겨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도 여러 차례 질책하셨듯이, 행동이 뒤따르지 않는 말 잔치에 몰두했던 지도자들, 특히 바리사이들에게 예수님을 ‘참 예언자’ 또는 ‘메시아’로 보고 있는 모든 이는 “(율법을 모르는 저 군중은) 저주받은 자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니코데모가 지적하고 있듯이, 율법이 명백하게 적시하고 있는 규정조차 무시하고 있는 사람들이 바로 그 바리사이들이니, 자신들이 바로 ‘저주받은 자들’이 되고 맙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말씀과 행적으로 사람들을 가르쳐 구원으로 이끌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분입니다. 아버지께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이 세상에 보내셨을 때는, 구약시대 예언자들의 시대처럼, 이 세상이 불의와 거짓과 다툼으로 말미암아 구원으로부터 멀어져만 가는 상황 속에 놓여 있을 때였으며, 이러한 상황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입니다. 따라서 정의와 진리와 평화가 다스리는 세상이 정착할 수 있도록 우리가 힘써야 할 때입니다.
오늘 하루, 의롭고 진실한 마음을 간직한 신앙인의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다가서, 다툼이나 분열이 아니라 평화와 일치의 분위기를 만들어내는데 앞장서는, 가슴 뿌듯한 하루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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