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제2주간 월요일]
요한 3,1-8
새로 태어남과 죄, 그리고 생존법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요한 3,5)
찬미 예수님! 부활의 기쁨 속에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온 니코데모를 만납니다.
그는 율법에 정통한 지도자였지만,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새로 태어남'의 신비를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미 늙은 사람이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습니까?
어머니 배 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나올 수야 없지 않습니까?" (요한 3,4)
예수님은 니코데모의 생물학적 사고를 영적인 차원으로 끌어올리십니다.
오늘은 이 '태어남'의 원리를 통해 죄의 본질이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이전 본성에서 벗어나 하느님 자녀라는 새로운 양식을 먹고 살 수 있는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리는 흔히 죄를 '도덕적인 실수'라고 생각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죄의 본질은 '정체성에 맞지 않는 퇴행적 욕구'입니다.
새로 태어난다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존재가 된다는 뜻이고, 그 존재로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전의 생존 방식을 버리는 '자기 봉헌'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새 정체성에 맞는 ‘양식’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죄가 생겨납니다.
수정란은 자궁에 안착하기 위해 자기를 봉헌해야 합니다.
자신의 자유로운 유영을 멈추고 자궁벽에 자신을 단단히 고정시켜야 합니다.
이것이 수정란의 봉헌입니다.
그러면 신비롭게도 '탯줄'이 생겨 그를 잡아줍니다.
이 탯줄을 통해 모체로부터 산소와 영양분이라는 '새로운 양식'을 공급받습니다.
놀라운 과학적 사실은, 수정된 배아 중 무려 50퍼센트 이상이 자궁에 안착하지 못하고 그냥 빠져나가 소멸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생물학적으로는 '화학적 유산'이라 하지만,
정체성의 관점에서 보면 '봉헌의 실패'입니다. 태아가 되었으면서도 여전히 난자 때처럼 혼자
자유롭게 살겠다고 고집하며 태중 안착을 거부하면, 그것은 태아에게 가장 치명적인 죄이며 곧 죽음입니다.
열 달이 지나면 아기는 다시 한번 새로 태어납니다.
이제는 자궁이라는 안락한 세계를 떠나야 합니다.
이때 아기에게 필요한 봉헌은 '탯줄을 끊는 것'입니다.
탯줄은 태아 시절의 생명선이었지만, 밖으로 나온 아기에게는 거추장스러운 과거의 잔재일 뿐입니다.
이제 아기는 엄마 젖을 먹어야 합니다.
하지만 단순히 젖을 먹는 것이 핵심이 아닙니다.
아기는 자신의 생존권 전체를 엄마 품에 맡겨야 합니다. 아기가 마치 이전 탯줄로 공급되는 것을
먹던 것처럼, 아무 것이나 먹으면 어떻게 될까요? 죄란 이런 것입니다.
늑대에게 키워진 아말라와 카말라, 혹은 개에게 키워진 옥사나 말라야와 같은 경우, 그 아이들은 주어지는 대로 먹었습니다.
본의는 아니었지만, 자신들을 그것들에 봉헌하여
그것들의 법을 따랐고 그것들이 주는 양식을 먹었습니다.
결국 인간 사회에는 들어올 수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아이가 자라 어른이 되면 이것도 새로 태어남입니다.
어른이 되었는데 여전히 엄마 젖을 갈망한다면
그것이 죄입니다.
「일본의 모자 공모 며느리 살해 사건 - 퇴행이 낳은 악마」 실제로 일본에서는 이 '퇴행적 욕구'가 부른 소름 끼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른바 '사카이데시 모자 공모 살인 사건' 혹은 이와 유사한 고부 갈등 살인 사건들의 수사 기록을 보면, 성인이 된 아들이 심리적으로는 여전히 어머니의 태중에 머물러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느 사례에서는 아들이 결혼한 뒤에도 어머니의 젖을 만져야 잠이 들 정도로 지독한 마더 콤플렉스에 시달렸습니다.
그는 자신의 아내를 한 명의 인격체로 사랑하는 '어른의 본성'을 살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어머니와 짜고 자신의 아내를 잔인하게 살해하거나 학대하는 데 동조했습니다.
어른으로 새로 태어났으면 아기 때의 이기심을 버리고 가정을 책임지는 새로운 본성을 살아야
하는데, 그 성장의 고통이 싫어 아기 시절의 안락함(어머니의 비뚤어진 사랑)으로 도망친 결과입니다.
죄란 이처럼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않고, 예전의 욕망으로 돌아가려는 관성'입니다.
이제 우리 신앙인의 핵심인 '하느님 자녀'로의 태어남을 봅시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야 한다"고 하십니다.
물은 우리가 먹어야 할 새로운 양식(말씀)이며 성령은 우리를 감싸 안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하느님 자녀가 된 우리에게는 이제 '인간적인 본능' 자체가 죄의 원인이 됩니다.
하느님 자녀는 인간이 가졌던 욕구, 곧 돈과 쾌락과 교명이라는 '삼구(三求)'를 봉헌해야 합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에게 주어졌던 '선악과'가 바로 이 봉헌의 상징입니다.
"모든 것을 다 주었지만, 이 하나만은 내 것임을 인정하라"는 하느님의 제안입니다.
이 선악과를 기쁘게 바쳐야만 영원한 생명의 상실을 막고 '생명나무'의 실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 원리를 가장 완벽하게 보여준 모델입니다.
하느님은 그에게 백세에 얻은 아들 이사악을 바치라고 하십니다.
인간적인 본성으로 보면 이는 말도 안 되는 가혹한 명령입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깨달았습니다.
자신이 더 이상 갈대아 우르의 이방인이 아니라
하느님의 축복을 상속받을 '믿음의 조상'이라는 정체성을 가졌음을 말입니다.
그는 자식에 대한 집착과 생존의 본능이라는 '옛 본성의 목'을 치기 위해 칼을 들었습니다.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봉헌했을 때, 하느님은 비로소 "이제야 네가 하느님을 경외하는 줄을
내가 알았다" (창세 22,12)며 그를 진짜 하느님의 사람으로 공인하셨습니다.
봉헌이 없으면 정체성도 없고, 정체성이 없으면 우리가 먹는 성체는 그저 밀떡일 뿐입니다.
오늘 복음의 마지막 구절을 가슴에 새깁시다.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영으로 태어난 이도 다 이와 같다." (요한 3,8)
아기는 어른이 왜 그렇게 선택하고 행동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어른은 어른의 본성이 요구하는 욕구대로 움직이지만, 아이는 아이의 본성의 눈으로만 보기 때문입니다.
어른이 되었는데도 여전히 엄마 젖을 찾는 사람은 결코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정체성에 합당한 양식을 먹는 사람은 바람처럼 자유롭습니다.
배아가 자궁에 안착해야 탯줄의 자유를 누립니다. 이전 본성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자아를 봉헌하고 성체를 양식으로 삼을 때 우리는 비로소 세상이라는 자궁에서 탈출하여 더 자유로운 세상에서 살게 됩니다.
「베다니아의 마리아 vs 가리옷 유다」 베타니아의 마리아와 가리옷 유다를 비교해 보면 좋습니다.
두 사람의 운명은 '무엇을 봉헌하고 어떤 양식을 갈망했느냐'에서 갈렸습니다.
마리아는 자신의 전 재산인 향유를 예수님의 발치에 쏟았습니다.
자신의 가장 높은 곳인 머리카락(자아)을 주님의 발밑에 놓는 '머리 밟기'의 봉헌을 한 것입니다.
그때 그녀는 예수님으로부터 '영원한 생명나무'의 기운을 수혈받아 부활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반면 유다는 어떻습니까? 그는 3백 데나리온이라는 돈 주머니를 움켜쥐고 놓지 않았습니다.
하느님 자녀라는 정체성을 거부하고 '도둑'이라는 이전 본성의 욕구를 따랐습니다.
돈을 얻기 위해 세상에 자신을 봉헌하였습니다. 결국 그는 썩은 사체와 같은 은전 서른 닢에 발톱이 묶여 스스로 목을 매는 지옥의 낭떠러지로 떨어졌습니다.
우리는 지금 어디에 서 있습니까? 나는 어떤 양식을 먹기 위해 나 자신을 봉헌합니까?
엄마 젖을 찾는 일본의 그 아들처럼 과거의 욕망에 갇혀 있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아브라함처럼 자신의 외아들 이사악도 하느님의 양식을 위해 기쁘게 봉헌하며 하느님의 본성으로 올라가고 있습니까?
우리는 이제 땅의 흙을 먹는 뱀이 아니라, 당신의 살과 피를 먹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그러니 우리 인간으로서의 낡은 욕망을 봉헌하고 하느님의 양식만을 바랍시다.
하느님의 말씀과 성체를 얻기 위해 나의 에너지를 얼마나 쓰느냐에 따라 내가 죄에서 얼마나 벗어나느냐가 결정됩니다.
신고사유를 간단히 작성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