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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4월 14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홍보국 작성일 : 2026-04-14 조회수 : 112

[부활 제2주간 화요일] 
 
요한 3,7ㄱ.8-15 
 
땅의 거인이 될 것인가, 하늘의 아기가 될 것인가?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 (요한 3,7)
찬미 예수님! 부활의 기쁨 속에 우리는 어제에 이어 니코데모와 예수님의 대화를 묵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인생의 근본적인 '태생'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모두 한 번은 부모로부터 태어났지만, 이제는 선택해야 합니다.
땅의 것과 결합하여 아래로부터 다시 태어날 것인가, 아니면 하느님의 사랑과 결합하여 위로부터 새로 태어날 것인가! 
 
성경 창세기 6장을 보면 인류 타락의 본질이 나옵니다.
"세상에 사람이 늘어나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의 아들들은 사람의 딸들이 예쁜 것을 보고, 저마다 마음에 드는 여자를 아내로 삼았다."(창세 6,1-2). 이것이 무엇입니까? 하늘의 정체성을 가진 이들이 땅의 욕망과 결합한 것입니다.
그 결과 "네피림", 즉 '거인'들이 태어났습니다. 
 
이 거인들은 세상에서 유명해지고 커지기를 원했습니다.
자아를 한없이 부풀려 스스로 신이 되려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이 '커지려는 욕구'를 보시고 "세상에 사람을 만드신 것을 후회하시며 마음 아파하셨다" (창세 6,6)라고 기록합니다.
아래로부터 태어나는 것은 세상의 물질, 돈, 명예를 사랑하여 그것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 속으로 내가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상의 것들은 모두 아래로 떨어지는
중력의 법칙을 따릅니다.
거인이 되려 할수록 우리는 무거워지고, 결국 그 무게 때문에 침몰하게 됩니다. 
 
1857년 9월, 캘리포니아의 황금 21톤을 실은 센트럴아메리카호가 침몰하던 순간의 기록은
이 '아래로부터의 결합'이 얼마나 치명적인지 보여줍니다.
당시 배에 탔던 광부들은 평생을 바쳐 캔 금화를 가죽 주머니에 담아 허리에 단단히 묶었습니다.
그들은 금과 하나가 되어 세상의 '거인'이 되고 싶어 했습니다. 
 
당시 목격자들의 증언을 담은 게리 킨더의 저서 『황금의 바다』에 따르면, 한 남자는 마지막
구명보트를 향해 갑판에서 바다로 뛰어내렸습니다.
보트와의 거리는 불과 1미터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수면에 닿는 순간, 마치 돌덩이를 매단 것처럼 그대로 수직으로 가라앉았습니다.
그가 사랑했던 금 주머니, 즉 그를 거인으로 만들어줄 줄 알았던 그 무게가 사실은 그를 바다 깊은 곳으로 끌어당기는 무덤의 닻이었던 것입니다.
그는 황금과 결합하여 아래로부터 태어났기에,
황금의 운명과 함께 영원히 가라앉았습니다. (출처: 게리 킨더, 『황금의 바다』) 
 
이렇게 내 자아를 키워 거인이 되려는 욕망은 결국 우리를 파멸로 이끕니다.
내가 무엇에 순종하고 무엇을 사랑하느냐가 내 정체성을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노아의 홍수 때 물 속으로 가라앉은 모든 거인들을 생각해보십시오.
살려면 더 나와 하나가 되기 전에 잘라내야 합니다.  
 
인간은 자신이 사랑하는 대상에게 순종하며 그것과 한 몸이 됩니다.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의 원작 동화 『빨간 구두』 (1845)에서 주인공 카렌은 빨간 구두를 사랑하여 그 구두와 하나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결합의 끝은 잔혹했습니다.
구두가 카렌의 의지를 삼켜버렸고, 구두는 살갗과 한 몸이 되어 벗겨지지 않았습니다.
카렌은 자신의 욕망인 구두를 벗기 위해 사형집행인을 찾아가 자신의 발목을 잘라달라고 애원해야 했습니다.
무언가를 좋아하면 그것과 하나가 되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려면 그만큼 힘들어집니다.  (출처: 안데르센, 『안데르센 동화 전집』) 
 
반면 위로부터 태어나는 것은 노아의 길입니다. 노아는 어떻게 위로부터 탄생할 줄 알았을까요?
그는 세상 사람들이 거인이 되려 할 때, 하느님의 말씀 아래서 작아지기를 선택했습니다.
땅의 거인이 아닌 하늘의 아기가 되기를 선택한 것입니다.
노아는 자기 판단을 버리고 산 위에 배를 지으라는 말도 안 되는 명령에 순종했습니다. 
 
위로부터 태어나려면 반드시 '나보다 높은 곳에 있는 분'을 발견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위'를 알아보는 법은 아주 명확합니다. 바로 '나를 위해 피를 흘려주는 사랑'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는 것입니다.
오직 나를 위해 자신의 살과 피를 내어주는 사랑만이 진짜 '위'입니다.
위를 만나면 나는 ‘아래’가 됩니다.
나를 작게 만들어주는 분은 나를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요한 3,14)라고 말씀하십니다.
구리뱀이 장대 위에 매달려 죽은 것은 '순종'의 상징입니다.
하느님의 뜻에 따라 구리뱀을 쳐다보는 행위는, 나를 살리기 위해 독을 제거하신 하느님의 질서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 구조가 바로 삼위일체 구조입니다.
아버지의 뜻이 아들의 희생을 통해 전달되고, 그것을 믿는 이에게 성령의 생명이 주어지는 원리입니다.
오직 이 삼위일체 사랑만이 하늘이고, 그 사랑 안에서만 우리는 하늘의 아기가 될 수 있습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성 막시밀리아노 콜베 신부님은 가이오비니체크 대신 굶주림의 감옥으로 들어갔습니다.
만약 가이오비니체크가 콜베 신부님의 희생을 단순히 '재수 좋게 살았다'고만 생각했다면, 그는 평생 수용소의 트라우마와 증오라는 아래의 중력에 갇혀 폐인으로 살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가이오비니체크는 자신을 위해 피 흘린 그 사랑이 '하늘에서 온 것'임을 즉각 알아보았습니다.
삼위일체 구조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콜베 신부님은 예수님처럼 부활을 믿었고, 그 부활은 성령에 의해 가능하며, 그 성령님은 하늘 아버지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이 사랑을 믿고 위로부터 새로 태어나기로
합니다.
그는 평생 전 세계를 돌며 증언했습니다.
"나는 이제 가이오비니체크가 아니라, 콜베 신부님의 생명으로 사는 덤의 인생입니다."
그는 94세로 선종할 때까지 원수를 용서했고, 콜베 신부님의 자녀로 살았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의 후예들입니다.
그의 자녀와 손자들은 아버지를 살린 그 신부님의 피가 자신들의 가문에 흐르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만약 콜베 신부님의 희생이 없었다면, 가이오비니체크의 후예들은 수용소 생존자의 자녀라는 상처 입은 정체성으로 살았겠지만, 이제 그들은 '성인의 사랑으로 탄생한 가문'이라는 자부심으로 살아갑니다. 
 
그들은 대대로 가톨릭 신앙을 굳건히 지켰고, 가난한 이들을 돕는 재단을 만들어 콜베 신부님의
사랑을 재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바라보는 이유도 이와 같습니다. 부활을 믿지 않으면 사람은 결코 자신의 피를
내어줄 수 없습니다.
내가 죽어도 다시 산다는 확신이 있는 사람만이 타인을 위해 목숨을 바칩니다.
예수님께서 피를 흘리신 것은 당신이 부활의 주님이심을 증명하신 것이고, 우리는 그 피 흘린 사랑 아래 설 때 비로소 땅의 중력에서 벗어납니다. 
 
위로부터 태어남의 정점은 나의 소속을 땅에서 하늘로 옮기는 결단에 있습니다.
내가 누구의 피를 수혈받아 살고 있는지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 세상의 옷을 벗고 하느님의 날개를 달다」 1206년, 아시시의 광장에서 청년 프란치스코는 일생일대의 결단을 내립니다.
부유한 포목상이었던 아버지가 아들을 법정으로
끌고 가 "내 돈으로 산 옷과 재산을 다 내놓아라!"라고 소리쳤습니다. 
 
프란치스코는 가문의 명예와 상속권이라는 아래로부터의 태생을 단호히 거부했습니다.
그는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벌거벗겨지신 예수님을 사랑하게 되었기에, 더 이상 세상의 옷을 입고 거인이 되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그는 가장 작은 자가 되었지만, 그 순간 하늘의 아버지는 그에게 성령의 날개를 달아주셨습니다. 그는 지상의 어떤 중력에도 묶이지 않는 진정한 자유인으로 부활한 것입니다. (출처: 보나벤투라, 『성 프란치스코 대전기』) 
 
교부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대가 땅을 사랑하면 땅이 될 것이요, 하느님을 사랑하면 하느님이 될 것이다."
(성 아우구스티누스, 『요한 1서 강해』 2,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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