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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4월 15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홍보국 작성일 : 2026-04-15 조회수 : 67

[부활 제2주간 수요일] 
 
요한 3,16-21  
 
억지로 한 사랑 실천은 위선일까? 
 
 
"진리에 따라 사는 이는 빛으로 나아와, 자기가 한 일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낸다." (요한 3,21)
부활하신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하기를 빕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빛'과 '심판'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빛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자기들의 행실이 악하여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했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아주 실존적인 고민에 빠집니다.
'선하게 살아야 하는 건 알겠는데, 내 마음이 안 따라줄 때는 어떡하지?'라는 고민입니다. 
 
많은 이들이 사랑을 실천할 때 '진심'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마음이 내키지 않을 때 하는 선행을 '위선'이라 부르며 꺼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는 "억지로라도 선행을 하십시오.
다만 진실해야 합니다.”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가장 안 좋은 것이 바리사이적 선행입니다. 이것이 진짜 위선입니다.
겉으로는 완벽한 선행을 베풀지만, 사실은 그 선행을 통해 자기 자신의 '의로움'이라는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억지로 하는 게 아니라 아주 즐겁게 합니다.
왜냐하면 그 선행이 나를 빛나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이 위선의 모델은 가리옷 유다입니다. 베타니아의 마리아가 예수님 발에 향유를 부었을 때, 유다는 불같이 화를 내며 말합니다.
"어찌하여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았는가?" (요한 12,5).  
 
말만 들으면 유다는 세상에서 가장 자비로운 자선가 같습니다.
하지만 요한 복음은 그의 실체를 폭로합니다.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가난한 이들에게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가 도둑으로서 돈주머니를 맡고 있으면서 거기 든 돈을 가로채곤 하였기 때문이다." (요한 12,6).  
 
유다는 '선행'과 '정의'라는 명분을 자기 탐욕을 채우는 방패로 썼습니다.
그는 자기가 선한 사람이라고 착각하며 살았지만, 사실은 자기 영광이라는 거짓의 늪에 빠져
있었습니다.
이런 위선자는 빛으로 나아올 수 없습니다.
이미 자신이 빛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솔직해져야 합니다.
그러면 자신의 선행이 위선임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 다음은 우리 대부분이 속해있는 단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위선'이 싫다며 아예 선행을 거부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아주 당당합니다.
"나는 마음에도 없는 소리 안 해. 내키지도 않는데
사랑한다고 하면 그게 거짓말 아니야?"라고 말합니다.  
 
심리학에는 '정서적 추론(Emotional Reasoning)'이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내가 그렇게 느끼니까 그것이 사실이다'라고 믿는 오류입니다.
1964년 뉴욕에서 일어난 '키티 제노비스 사건'은 이를 비극적으로 증명합니다.
한 여성이 30분 동안 괴한에게 습격당하며 비명을 질렀지만, 38명의 이웃 중 누구도 돕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그들이 고백한 이유는 소름 돋습니다. "내가 지금 불편하니까 저 소리는 별일 아닐 거라고 스스로를 설득했죠." 그들은 '돕고 싶지 않은 기분'을 '돕지 않아도 되는 정당한 이유'로 둔갑시켰습니다.
이는 솔직함을 핑계로 어둠 속에 누워 있는 게으름일 뿐입니다. 
 
우리는 이 때문에 예수님을 만나지 못함을 알아야 합니다.
성령의 감동이 오기만을 기다리며 평생 준비운동만 하다가 끝나는 분들입니다.
"주님, 저도 사랑하고 싶어요. 제 마음을 뜨겁게 해주세요.
그러면 그때 제가 전 재산을 다 바칠게요."라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영원히 그런 마음은 들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여기서 '운전과 주유소'의 비유가 필요합니다.
운전을 전혀 할 줄 모르는 사람은 길가에 있는 주유소가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주유소는 그에게 풍경의 일부일 뿐입니다.
하지만 억지로라도 운전대를 잡고 길을 나선 사람은 다릅니다.
차를 몰고 가다 보면 곧 기름이 떨어집니다.
'내 힘으로는 더 갈 수 없구나!'라는 한계를
절감하는 순간, 그 사람의 눈에는 오직 주유소 간판만 보입니다. 
 
선행도 이와 같습니다.
내 힘으로 사랑하려고 억지로 노력해본 사람만이 자신의 영혼이 얼마나 텅 비어 있는지 알게 됩니다.
"주님, 저 사람을 미워하지 않으려고 억지로 웃어줬는데 속에서는 천불이 납니다.
저는 이것밖에 안 되는 인간입니다!"라는 탄식이 터져 나옵니다.
바로 그때, 우리는 우리를 채워주실 '참 빛'이신 그리스도(성령의 주유소)를 절실히 찾게 됩니다.
주유소가 필요한 건 차를 움직이는 사람뿐입니다.
가만히 서 있는 사람에게 성령의 은총은 필요 없습니다. 
 
베트남의 구엔 반 투안 추기경님은 독방에 갇혀 있을 때, 자기를 증오하는 간수들을 사랑하라는
주님의 명령을 실천하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침을 뱉는 그들을 어떻게 진심으로 사랑하겠습니까? 
 
그는 훗날 『희망의 유서』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그들을 사랑하기로 결정했습니다.
하지만 내 감정은 결코 협조적이지 않았습니다.
억지로 미소 짓고, 억지로 그들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그것은 내게 고문과도 같았습니다."
추기경님은 그 '억지 사랑'의 고통 속에서 자신이 얼마나 무력한지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더 간절히 성체를 원했습니다.
"주님, 제 힘으로는 저 간수에게 1분도 웃어줄 수 없습니다.
제발 제 안에 오셔서 저 대신 사랑해 주십시오." 그는 몰래 전달된 포도주 세 방울과 빵 부스러기로 매일 미사를 봉헌하며 그 '억지 사랑'을 채워갈 신적 에너지를 수혈받았습니다.
결국 그 억지 사랑에 감동한 간수들이 회개하고 그를 돕기 시작했습니다.
추기경님이 억지로라도 시작하지 않았다면, 그는 결코 성체의 절대적인 필요성을 깨닫지 못했을 것입니다.
(출처: 구엔 반 투안, 『희망의 유서』 2000) 
 
선행에는 위선이 없습니다.
다만 위선자가 선행을 할 수 있을 뿐입니다.
내가 나쁜 마음을 먹고 빵을 주어도, 그 빵은 굶주린 아이의 배를 채우는 '진실한 선'이 됩니다.
그리고 그 빵을 주느라 내 손이 떨리고 마음이 불편하다면, 그는 축복받은 사람입니다.
드디어 자신 안의 어둠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로마서 7장에서 자신의 한계를 절규합니다.
"나에게 선을 행하려는 의지는 있으나 그것을 실행할 능력은 없습니다. ...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구해 줄 수 있습니까?" (로마 7,18.24).
바오로는 억지로라도 선을 행하려 투쟁했기에 자신의 비참함을 보았고, 그 절망의 끝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구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로마 7,25)라고 외치며 '참 빛'으로 뛰어들었습니다. 
 
억지로라도 사랑하십시오.
내가 억지로 신호등을 지킨다고 그것이 위선일까요?
법을 지키는 것이기에 위선이 아닙니다.
미운 사람에게 억지로 커피 한 잔을 건네십시오.
마음은 부글부글 끓어도 입으로는 축복의 말을 뱉으십시오.
그것이 주님 명령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십시오. 다만 솔직하십시오.
그때 우리는 깨달을 것입니다.
'아, 내 안에 사랑이 없구나.
주님 도우심이 필요하다!'
그 정직한 절망이 우리를 참 빛으로 안내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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