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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5월 5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홍보국 작성일 : 2026-05-05 조회수 : 171

왜 주일 미사 한 번은 나와야 하는가?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요한 14,27) 
 
찬미 예수님! 부활 제5주간 화요일입니다.
오늘 복음은 십자가 죽음을 앞두고 제자들을 떠나셔야 하는 예수님의 고별사입니다.
스승이 떠난다는 사실에 제자들은 두려움과 불안에 휩싸여 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은 아주 이상한 선물을 남기십니다.
돈도 아니고 권력도 아닌, 눈에 보이지도 않는 '평화'를 남기고 가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왜 하필 평화를 남기셨을까요?
그리고 우리는 왜 일주일에 한 번씩 주일 미사에 나와 그 평화를 받아 가야만 할까요? 
 
제가 어렸을 때의 일입니다.
하루는 작은형과 단둘이 점심을 챙겨 먹어야 했습니다.
부모님은 모두 생계를 위해 일터로 나가신 상태였습니다.
당시 저희 집은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냉장고조차 없던 가난한 시절이었습니다. 
 
부엌을 뒤져보니 밥솥에 밥은 있는데, 아무리 찾아도 반찬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배는 고프고 반찬은 없으니, 형과 저는 어쩔 수 없이 물에 맨밥을 말아 먹기로 했습니다.
맹물에 밥을 말아 몇 수저 떴지만, 도저히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서러운 마음에 부엌을 다시 샅샅이 뒤졌는데, 기적처럼 작은형이 구석에서 '총각김치'가 가득 든 통을 찾아냈습니다. 
 
어머니가 일터로 나가시며 저희를 위해 숨겨두듯 남겨놓으신 반찬이었습니다.
그 맹물에 만 밥에 총각김치를 얹어 먹는데, 세상에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도 그 맛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때 물 말은 밥을 먹던 저희 형제들의 마음속에 불안이나 원망이 있었을까요?
전혀 없었습니다.
집이 가난해서 어떤 때는 라면만 먹고 지내야 할 때도 있었지만, 저희는 부모님이 저희를 단 한 끼도 굶기신 적이 없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부모님이 우리 눈앞에 보이지 않아도, 어딘가에 반드시 우리가 먹을 것을 다 준비해놓으셨을
것이라는 압도적인 믿음이 있었습니다.
부모님이 세상에 나가 고생하시는 것도 다 우리를 먹여 살리기 위함이며, 결코 우리를 버려두고 떠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평화'입니다.
눈앞에 사랑하는 이가 없어도, 그가 나를 위해 남겨놓은 무언가(총각김치)를 발견할 때 영혼에 스며드는 절대적인 안정감. 저희 형제들이 아주 착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어른들로부터 "아이들이 어쩌면 다 이렇게 착하냐"는 말을 종종 들었던 이유는, 바로 이 '보이지 않아도 믿어지는 평화'가 저희 내면을 꽉 채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 심리와 생태계를 관통하는 아주 중요한 '법칙' 하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불안은 인간을 악하게 만들고, 평화는 인간을 선하게 만든다'는 생존의 법칙입니다. 
 
아이가 언제 악해지고 이기적으로 변할까요? 부모의 돌봄을 확신하지 못할 때입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불안정 애착(Insecure Attachment)이라고 부릅니다.
누군가 나에게 평화(양식, 사랑, 보호)를 거저 공급해 준다는 믿음이 깨지는 순간, 아이는
'이제 내 생존은 내가 책임져야 한다'는 극도의 불안감에 휩싸입니다.
스스로 생존을 책임져야 하는 인간은 짐승의 본능으로 퇴행합니다.
남을 짓밟고 빼앗아야만 내가 살 수 있다고 믿기에 악해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자녀에게 이 평화를 주는 존재여야 합니다.
훌륭한 어머니는 자신이 곁에 없을 때도 자녀가 평화를 누리도록 반드시 무언가를 남겨놓습니다. 어떤 신부님은 돌아가신 어머니를 회상하며, 매일 새벽 연탄불을 갈아주시던 그 소리와 온기 때문에 어머니가 안 계신 빈방에서도 늘 마음이 평화로웠다고 고백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 영혼의 완벽한 어머니이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당신의 빈자리에 불안을
남기지 않으십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요한 14,27) 
 
그런데 예수님은 왜 굳이 제자들을 떠나셔야만 했을까요? 곁에 계속 계시면 더 평화롭지 않았을까요?
주님은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가 아버지께 가는 것을 기뻐할 것이다.
아버지께서 나보다 위대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요한 14,28) 
 
이 말씀을 이해하려면 앞서 말씀드린 생존의 법칙을 떠올리시면 됩니다.
어머니가 곁에서 자녀를 계속 돌보고 싶지만, 자녀에게 양식(평화)을 안정적으로 공급하려면
반드시 집을 나서서 '더 큰 생명과 재화가 있는 곳(일터/남편)'으로 가야만 합니다.
예수님이 아버지께로 가시는 이유는, 아버지가 바로 모든 생명과 은총, 평화가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근원(위대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아버지께 가셔야만, 성령이라는 영원한 배송 시스템을 통해 하늘의 무한한 양식이 우리 식탁 위로 매일 배달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버리고 가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영원히 굶주리지 않을 우주적 공급망을 개통하러 가시는 것입니다.
이 평화의 공급망을 가장 잘 보여주는 구약의 설계도가 바로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 생활입니다.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은 척박한 광야에서 당장 먹을 것이 없어 극도의 불안에 시달렸습니다.
그들은 모세를 원망하며 악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하느님은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주십니다.
하느님은 매일 새벽 만나를 내려주시며, 그들이 생존의 공포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자녀라는
'자존감(왕의 여유)'을 누리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아주 이상한 법칙을 하나 주십니다.
"만나는 매일 그날 먹을 만큼만 거두어야 한다. 다음 날 아침까지 남겨두지 마라." (탈출 16,19 참조). 
 
왜 그러셨을까요? 인간은 하느님을 쉽게 '망각'하기 때문입니다.
창고에 양식을 가득 쌓아두면, 인간은 하느님이 주시는 평화가 아니라 내 창고의 크기를 믿기 시작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의 약속을 잊고 만나를 몰래 남겨두었을 때, 그것은 어김없이 벌레가 생기고 구역질 나는 악취를 풍기며 썩어버렸습니다. (출처: 『주석 성경』 탈출기 16장) 
 
평화는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매일 공급자와 접속하여 새롭게 받아오는 것입니다.
만나가 썩어버렸듯, 하느님과의 접속이 끊긴 인간의 영혼은 부패합니다.
기억하지 않으면 어둠으로 빠져드는 것, 이것이 인간 본성의 한계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남기신 '총각김치', 즉 평화의 실체는 무엇일까요?
바로 제대 위에서 쪼개어지는 그분의 '살과 피(성체)'입니다. 
 
주님은 최후의 만찬에서 성체를 떼어 주시며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루카 22,19) 라고 명령하셨습니다.
평화를 유지하는 유일한 방법이 바로 이 '기억(Anamnesis)'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왜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은 주일 미사에 나와야 할까요?
교회가 정한 귀찮은 규칙이라서가 아닙니다. 엿새 동안 험난한 세상에서 바오로처럼 돌을 맞고
상처받으며 "내 생존은 내가 책임져야 해"라며 악바리처럼 버티느라 짐승처럼 변해가는 우리 자신을 구출하기 위해서입니다. 
 
주일 미사에 나와 성체를 모시는 순간, 우리는 어릴 적 맹물에 만 밥을 먹으며 총각김치를 베어 물었을 때의 그 절대적인 평화를 다시 '기억'해냅니다.
"아, 하느님 아버지가 나를 먹여 살리시는구나.
내가 버려진 고아가 아니라, 하늘의 모든 창고를 상속받은 하느님의 자녀구나!"
이 자존감을 회복하는 시간이 바로 미사입니다. 
 
우리가 매주 미사에 나와 모시는 성체와 주님의 말씀은, 마치 사라지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하느님은 우리를 잊지 않으신다는 믿음을 줍니다. 거기서 오는 평화가 우리를 악하게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그 사랑을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를 악에서 지켜줌을 상기합시다.
새롭고 대단한 맛이 아니더라도 매일 기도하고, 매일 성체를 영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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