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2주일
어느 과학자가 오랜 실험 끝에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비 품종을 만들었고, 이제 부화되어 고치에서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오른쪽 날개와 몸, 그리고 왼쪽 날개 대부분이 고치에서 나왔습니다. 그런데 나비의 왼쪽 날개 끝이 고치 입구에 끼어 있는 것이 아닙니까? 나비는 빠져나오려고 계속 파닥거리고 있었지만, 그 힘이 빠져 가는지 그 파닥임의 간격이 점점 길어졌습니다.
과학자는 이 긴장의 순간, 칼을 들어 고치 입구를 잘라냈습니다. 이제 드디어 나비는 고치를 빠져나왔습니다. 과학자는 크게 기뻐했습니다. 하지만 그 기쁨도 잠시, 절망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고치에서 빠져나온 나비는 날지 못했습니다.
고치에서 빠져나오려는 파닥임은 나비가 날개 끝까지 피를 보내기 위한 본능적 활동이었습니다. 그래야 나비가 고치에서 나올 때 새 생명을 누리며 마음껏 날 수 있습니다. 과학자는 생명을 구하려 했으나 오히려 나비의 활동 능력을 제거한 것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런 실수를 피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어려움에 부닥쳤을 때, 당신의 사랑을 억누르며 곧바로 구하러 달려오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노력이, 또 우리의 열정이 하느님의 은총을 받아들여 온전히 생명을 누릴 수 있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하느님만 탓하며 좌절하고 포기해야 할까요? 하느님의 침묵 역시 그분 사랑에서 나오는 엄청난 은총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밝히셨습니다. 부활이야 영광이라 할 수 있지만, 하느님께서 수난과 죽음을 겪으신다는 것을 이해하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이 말씀은 실패의 삶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합니다.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마태 16,22)
인간적인 애정과 충성심에서 비롯된 외침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 속내는 ‘고난 없는 메시아, 승리만 있는 구원’이라는 세속적 욕망이 깔려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마태 16,23)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의 유혹을 받으실 때, 사탄에게 했던 말씀(마태 4,10)과 일치합니다. 하느님의 계획을 가로막는 유혹자의 역할을 꾸짖으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내게서 물러가라.”라는 의미는 “내 뒤로 가라.”라도 번역된다고 합니다. 즉, 스승의 앞을 가로막아 걸림돌이 되지 말고, 스승의 뒤를 따르는 제자 본래 자리로 돌아가라는 명령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가 되고자 하는 모든 이에게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 때문에 감수해야 하는 손해, 이웃을 향한 용서와 인내, 복음적 가치를 지키기 위해 따르는 불편함을 기꺼이 짊어져야 합니다. 편하고 쉬운 것으로는 주님의 은총 안에 머물 수가 없습니다. 세상의 인정과 물질적 유익을 얻기 위해 하느님과의 관계를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의 명언: 인생의 낭비는 베풀지 않는 사랑, 사용하지 않는 능력, 아무것도 감수하지 않으려는 이기적인 신중함, 그리고 고통을 피하려다 결국 행복도 놓쳐 버리는 데 있다(메리 촐먼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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